이산 놀이 01

이산 놀이 01

#
이 글에 앞서 오류 두 가지를 안내하고자 한다.

1.”신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신의 존재성을 증명한다.”
2.”뭔지는 몰라도 문제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오류다. 하지만 그렇기 떄문에 주체의 불완전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 글에 앞서 주어(또는 주체)는 미시적으로는 ‘나’ 거시적으로는 ‘너’ 또는 ‘인간’을 뜻한다고 주장하겠다.
짧은 글이기 떄문에 왜 이런지는 설명할 생각이 없다. 그냥 내가 이러하게 가정하고 시작하니 가정하에 이 글을 읽으면 된다.

##
‘천지 창조’로 시작되는 창세기는 ‘다스리라’, 그리고 ‘보기 좋았더라’로 1장을 마무리한다.
풀어 말하자면, 나는 이 글을 공간이 있고, 공간 안에 무수한 대상이 있고, 대상은 일의 대상이 되고, 일을 하는게 마땅하다(좋다)고 이해한다.
어떠한 바탕이 있다고 치면, 그제서야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간(바탕)의 존재(있음)을 상정하면 대상(것)이 있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간 내애서 대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하는 것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고 구분의 문제다.
대상은 ‘어떤 것’이다. ‘것’은 ‘덩어리’가 있다. 덩어리가 있다는 말은 그것이 그것이 됨, 즉 덩어리이거나 아님을 말하는 끝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구분의 문제다.
구분은 공간을 어떻게 부를지를 풀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 공간은 빨간색이고 이 공간은 파란색이다. 이 공간은 나 이고 이 공간은 내가 아니다. 이런 식이다.
부른다는 것은 이것은 어떠한 것이다, 라고 어떠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속성, 특징을 부여하는 것이다.
부르는 것은 일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일의 대상이 된다, 다루어진다는 것은 그것에 방향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방향성이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고, 그 의미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은 하나의 덩어리고 덩어리는 끝이 있었다. 방향이 부여되기 전에는 끝은 그냥 끝일 뿐이지만, 방향이 부여되면 끝은 처음을 상정한다.
처음에 어떠한 특징이 대상에게서 발현되고, 그것이 어떠한 끝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주석 1)
불리는 것이, 즉 관찰되는 것이, 일의 대상이 되어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왜 마땅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앎을 추구한다고 했다. 앎이 대상 안에 있는 것인가? 인간이 대상에게 부여하는 것인가?
후자라면 인간이 대상에게 앎의 대상 즉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인간이 무언가를 한다.”로 지칭할 수 있다.
무언가를 하면 지루하지 않다. 그건 보기 좋다.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볼 만 하다.
일을 하기 위해서 인간은 공간을 가정한다.
맨 앞서 말했던 1번 문장에 빗대어 말하자면 ‘일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일의 존재성을 증명한다.’
마치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되듯, 일은 어떠한 것, 즉 일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일은 대상을 증명한다.
이 글은 오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체의 불완전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주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주체의 존재성을 증명한다.’
이 글은 오류다. 하지만 그렇기 떄문에 주체의 불완전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주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주체의 존재성을 증명한다.’
이 글은 오류다. 하지만 그렇기 떄문에 주체의 불완전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

/*이 글은 탈출구가 없는 반복문이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
주체는 작은 의미에서 ‘나’, 큰 의미에서 ‘인간’이다.
일은 인간을 증명한다. 또는 무한 소급한다.*/

###
덩어리는 쪼개진다. 그 쪼개진 것 중 일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불리는 것이다. 바위를 깎아냈을 때, 돌은 돌, 자갈, 가루로 나뉜다.
만약 돌, 자갈, 가루가 나뉘고 내가 그 일을 한 목적이 큰 돌을 가져가기 위함이었으면 그것은 더 이상 돌, 자갈, 가루로 불리지 않는다. 돌, 자갈, 모래, 먼지로 불리지도 않는다.
바위는 ‘돌’과 ‘나머지’가 된다. 나는 그 대상들에 가져갈 것, 가져가지 않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가져갈 것과 가져가지 않을 것은 ‘덩어리’를 나눈다. 그렇게 해서 한쪽 덩어리는 ‘돌’이고 한쪽 덩어리는 ‘나머지’다.
‘돌’과 나머지’는 떨어져 있다. 그것을 ‘돌’과 ‘나머지’로 부르기 위해서는 떨어뜨려 놓아야만 한다.

부피는 넓이의 모음이다. 넓이는 선의 모음이다. 선은 점의 모음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부르기 위해서 떨어뜨려 놓아야만 한다.
부피를 다루면서(즉, 부피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점을 부른다면, 그리고 점을 다룬다면 부피는 부피로서 덩어리를 갖지 못한다.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점을 다루면서 부피를 부른다면 부피는 점들일 뿐이다. 점들은 덩어리를 가진다. 부피는 점으로서 덩어리들이다.
점을 다룰 때에 점은 그 자체로서 덩어리여야만 한다. 모든 덩어리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부피는 부피 자체로서 덩어리일 필요가 없다.
덩어리는 쪼개진다. 점을 쪼갠 덩어리는 그 자체로서 덩어리여야만 한다. 점을 쪼개면 점이 생긴다. 왜냐하면 나는 점에 마음을 두기 때문이다.
만약 부피를 다루면서서 점을 부른다면, 그리고 부피 자체가 덩어리이어야만 한다면, 점을 다룰 수 없다.
부피를 쪼갠 덩어리들은 부피여야만 한다. 모든 덩어리는 부피다. 부피를 쪼개면 부피가 생기고, 모든 점은 부피다. 왜냐하면 난 부피에 마음을 두기 때문이다.
덩어리 끼리는 떨어져 있다. 이어지지 않았다.(연속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덩어리와 덩어리가 떨어져 있는 그 사이는 무엇인가?
그러함은 다루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의미가 없다) 그러함은 부르지 않는다.(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함은 있지 않다.(존재하지 않는다.) (주석 2)(주석 3)

바위가 쪼개진다. 바위는 돌을 얻기 위해 쪼갰고, 돌 외에 신경쓰이는 것, 걸리적거리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큰 돌과 작은 돌이 나온다. 그 외의 것은 없다. 모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없다.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루는데 있어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과 돌은 떨어져 있다.
떨어져 있는 그 사이는 다루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부르지 않는다. 있지 않다. 돌을 얻었다. 일을 마쳤다. 우리는 일을 했다. 우리는 일을 돈으로 바꾼다.
돈은 쪼개진다. 돈은 오만 원, 만 원, 오천 원, 천 원 짜리들이다. 그 외는 없다. 다루지 않는다. 서로 오만 원, 만 원, 오천 원, 천 원짜리들을 나눈다. 돈을 갖고 일터를 나온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독자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다. # 문단의 2번 오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생각을 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주석 1 : 마치 메모리에 데이터가 있는데, 그것을 냅두면 그것은 쓰레기 값이지만 인간이 다루기 위해 주소값에 포인터를 지칭해주면 그것은 무언가가 된다.
그리고 일을 안할거면 귀찮게 포인터를 지정해 줄 일도 없다.)
(주석 2.덩어리는 열린 집합이다. 열린집합은 경계를 포함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점을 다룬다면, 점은 덩어리이기 때문에 열린 집합이다. 그러한 경우 부피는 점의 모임이다. 부피도 열린 집합이다. 그러나 어떤 점이 부피이고 어떤 점이 부피가 아닌가의 구분은 또 다른 문제다. 생각할 수 있는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주석 3.이 부분은 일전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에 대한 상상’으로 설명한 부분이 있다. 그때 인간은 없음을 증명하지 못하지만, 있음을 말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없음을 말할수밖에 없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금은 짧은 글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광고

2018 한-터키 정상회담으로 보는 한국기업의 경제적 사업들

기사들을 몇 개 읽고 정리한다.(기사목록은 맨 하단 첨부)

 

이것저것 읽고 대충 정리하자면
1.터키경제는 높은 성장속도를 보이고 있으며
2.내수환경이 한국보다 더 튼튼하기에 인프라의 건설 시 기대되는 파급효과가 더 높을 것이다.
3.따라서 수출의존적인 한국기업으로서는 교통, 인프라, 의료, 에너지 같은 거대사업에 높은 기대를 할 것이고 터키정부도 그러하다.
(+한국 기업들이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의 불안으로 시장을 잃어버린 것이 터키 시장에 대한 매력을 높일 것)
4. FTA프레임워크를 통해 이중과세를 예방하고 해운물동을 촉진한다(expedite)
5. 기존/진행중 사업예: Yavuz Sultan Selim Bridge, Çanakkale 1915 Bridge (Daelim, SK E&C and Limak – and Turkey’s Yapi Merkezi OGG ,Jan. 2017), YEKA(카라피나르 신재생에너지지역(1GW solar plant))(Hanhwa Q-Cells-Kalyon),Tufanbeyli Thermal Power Plant(coal Plant),SOCAR Turkey Aegean Refinery (STAR) andAliağa, İzmit and Kırıkkale refineries for Tüpraş.(GS E&C)
6. 차기사업예 : Kanal Istanbul(인공운하,SK E&C interested, $16bil),Eurasia Tunnel(해저터널)
7.아무튼 한국측 관련업체들 : SK Engineering and Construction (E&C), Hyundai Motors(Local Parter Kibar Holding), Samsung, LG(electronics(TV), Chem.), Hanwha Q-cells, Daelim Industrial and GS E&C

* 추신하자면, 어떻게 한국 기사들은 정상회담 관련 경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무슨 터키 총리란 사람이 얼굴한번 보고 놀러온것도 아닐테고,  남북 정상회담 관련 한마디 하고 끝내는 것도 아닐텐데,  좀 이상하다. 여행객 교통사고 사망 사건 이야기뿐이다.

 

참고 기사

https://www.dailysabah.com/columns/cemil-ertem/2018/05/04/erdogans-visit-to-seoul-and-a-comparison

https://www.dailysabah.com/economy/2018/05/03/turkey-south-korea-agree-on-cooperation-for-success-of-2023-vision

https://www.dailysabah.com/economy/2018/05/04/erdogan-meets-executives-of-south-korean-firms-discusses-current-future-projects

http://www.hurriyetdailynews.com/erdogan-hails-peace-efforts-on-korean-peninsula-131185

가제 : 삶, 시간, 자유, 의미02

이어지는 글

전개2 : 흐름에 있어 태어남과 죽음의 전제

죽음이란 태어남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도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않는다.

만약 탄생이 불멸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하다. 하지만,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영원함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것이 출발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결코 무한, 즉 <한계>가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반드시 흐름을 전제하며, 시간을 전제한다.(C)ii.) 그리고, 탄생(시작점)이라는 순간을 전제하기에, 어쨋건 불완전한 상상물에서 멀리 흘러나가는 것과 같다. 즉, 불완전함과 떨어질 수 없다.

이와 달리, 완전함은 신적인 개념이다. 신은 영원하다. 하지만 완전하기 때문에 태어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 신은 탄생하지도, 죽지도 않는다. (또한, 신이 전능하다 할지라도 태어남은 능동적인 일이 아니므로 이는 신의 능력과도 무관하다.) 어떠한 <한계>도 내포하지 않는다.(무한하다.) 신은 시간이 전제되지 않는다. 첫째로,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흐를 곳이 없다. 흐름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간다는, 일정한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이 흐름 또한 양 끝을 전제하는 말이기에 한계지어질 수 없는 신은 방향이 없다. 둘째로,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결핍될 수 없다. 진행하거나 후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없다. 즉,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앎이 소용이 있을 무지의 구석이 없고, 그 움직임이 소용이 있을 미지의 구석이 없다.

이에 따라 탄생에서 이어지는 불멸과 신의 영원은 크기나 위대함으로 비교될 수 없다. 탄생에서 이어지는 불멸에 있어서는 두 가지가 불멸한다면 먼저 시작한 것이 더 크다. 전자는 이렇게 크고 작음을 논할수 있지만, 후자는 이러한 비교가 불가능하다. 전자와 후자 사이의 비교도 불가능하다. 후자의 무한은 처음부터 <한계>를 논할 수 없다. 즉, 신이 무한하다, 완전하다, 또는 영원하다고 논박하는 것은 인간에게 소용이 없다. 설령 인간이 모든것을 생각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생각하거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이것은 이미 흐름(일과생각의 진행과 그 방향)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신의 완전함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흐름은 방향과 진행을 내포하기 때문에, 결정됨과 가능함(명과 운;운명)을 전제한다. 마치 실타래가 직물로 엮이고 잘리는 과정(진행) 처럼, 많은 사건들이 엮이고, 다시 일련의 사건으로 가공되는 진행을 거친다. 흐름의 일부를 이미 결정된 일로 부를지 가능한 일로 여길지 입증하는 것은 먼저의 절차로서 옳지 않다. 그것은 미래의 일을 이미 보장된 결과를 갖고 행하려는 것처럼 허황된 시도이다.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강 끝을 보고 다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내려오고자 한다면 그 순간 강 끝에 다다르고자 하던 기존의 목적을 상실한다.(만약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왜 그것을 하고 있는지 부터 재고해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강을 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흐름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오늘의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부를 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고, 모른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상자를 열기전엔 죽은것도, 죽지 않은 것도 고려할 의미가 없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다.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강 끝은 가 봐야 강 끝을 알게 된다. 결정된 일과 가능한 일의 구분은 단지 하나의 것을 다른 양태로서 보는 것이다. 시선이 변한다고 그것이 다른 것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시선이 달라지면, 그것을 갖고 무엇을 할지가 달라질 뿐이다. 죽은 고양이를 어떻게 할지, 산 고양이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고양이 그 자체를 겪고,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고양이가 무엇인가?

태어남은 그것이 출발점이기 때문에 흐름의 일부로만 존재할 수 있다. 또한 흐름은 방향과 진행을내포하므로 그 끝이 당연히 전제된다. 따라서 태어남은 죽음을 전제한다. 죽음은 상자안의 고양이와 같다. 그것이 예정된 운명인지, 가능성인지는 중요하지않다. 죽음이라 불리는 모르는 것이 있다. 죽음을 결정된 것으로 또는 피할 수 있는 것으로 확신할 것이 아니다. 다만 모름으로서 죽음의 실존을 직시하고,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결론 2 : 태어남은 죽음을 전제한다. 죽음은 그것을 겪기 전까지는 결정된 것도, 가능한 것도 아니다. 죽음이 무슨 소용인지가 중요하다.

전개 3:  죽음의 소용 / 신, 자유, 의미

가제 : 삶, 시간, 자유, 의미 01

초안

대략적인 주장은 :  “죽음 때문에 인간의 삶이 있고, 자유롭다”라는 방향이다.

가정 :
** 시간에 대한 세가지 가정
a)일상적인 의미로서, 시간은 <한계>를 내포한다.
– (예)점심시간 한시간, 20대는 10년, 여성의 평균 수명은 74세, 조선왕조 500년

b)시간은 <흐름>을 내포한다.
– 일상적인 의미로서 흐름은 증가/진행으로 여겨진다.
– a)의 한계를 상정하면 모래시계의 양 극단과 같이 감소/후퇴의 의미도 공존할 수 있다.

c)비일상적인 의미로 확장하면, 인간이 상상하여 <한계>를 벗어나서 시간의 외연을 확장하는 시도는 두가지가 있다.
– c)i. 시간이라는 가정을 없앤다.(시간 개념은 없다 or 불가능하다 or 모른다.)
– c)ii. 시간은 한계 없이 흐른다.(시간의 개념은 있다 or 가능하다.)

** 죽음에 대한 세가지 가정
d)i.죽음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게 되어 버리는 “사건”>이다.
– 죽음은 시간적인 <한계>를 내포한다. 시간은 죽음보다 먼저 가정된다.
– 일상적인 의미의 죽음이란 움직임, 생각이나 감정이 없는 것, 그리고 그러할 기반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생명에 대해 쓰이지만, 생명이 아닌것에도 쓰일 수 있다. (예)컴퓨터가 죽었다
.
d)ii. <영향력이 없게 되어버린다>는 점에서, 죽음은 어떠한 대상이 대상으로서 설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죽음은 <대상>을 가정한다.
– 대상은 이것과 저것이 <대상>그리고 <대상이 아닌 것>으로서 구분됨을 의미한다.

e)태어나지 않은 것은 죽을 수 없다. 죽음이란 삶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건”이다.

f)비일상적인 의미로 확장하면, 인간이 상상하여 <한계>를 벗어나 죽음의 외연을 확장하는 시도는 다음과 같다.
– 죽었다 깨어나는 경우처럼,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가는 경우 (예)사후세계 경험,냉동인간,전신 마취
– 불멸불사하는 경우 (예)인간 복제, 사이보그, 정신을 컴퓨터로 복제
– 죽음의 개념을 부분적으로 쪼개거나 기타 다른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 (예)뇌사

전개 1 : 사건으로서 죽음의 불명확성

죽음이라는 개념은 여러가지 속성으로서 생각된다. 그러나 f)와 같은 시도를 통해 죽음이란 개념을 쪼개고, 엄밀하게 만들어 불순물을 거르다 보면, 육신의 소멸이나 정신의 소멸 같은 개념들은 모호해 진다. 육신이 없어졌을 때, 그것을 기계적으로나 복제 같은 방법을 통하여 재구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존의 것과 과연 같은 존재로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논란거리가 되어 의심 가능한 상태로 보류된다.

결국 d)<i.아무런 영향력이 없게 되어 버리는 ii.”사건”>이 그 핵심으로 남게 된다. 여기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게 된다는 것과 사건이 각각 무엇인가? 특히 시간적인 의미에서 <사건>이 무엇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i.”아무런 영향력이 없다”는 잊혀진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ii.”사건”은 “시간”과 같은 개념이거나, “시간”이라는 전제 하에서만 설 수 있는 하위 개념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사건은 순간이다. 많은 순간들이 모두 사건은 아니고, 인간에 의해 특정하게 주목되는 순간이 사건이 된다. 사건은 실제로는 일정한 기간(시간)을 두고 터졌다 할지라도 어떤 점(시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점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마치 1cm를 재어서 점을 찍을 때, 그것이 실제로는 1.01cm 이거나 0.01cm 짜리 면적의 연필 자국일수도 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아무리 정밀한 도구가 있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항상 어림잡을 뿐이고, 점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기 위한 경계로서, 일종의 가정과 약속에 불과하다. 실제로 점을 지적할수는 없으며, 증명할수도 없다. 우리가 점의 개념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에 불과하다. 길이로서 말하자면, 점이란 0에서 시작하여 0으로 끝나면서도 그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인간은 0에서 시작하여 1에서 끝나는 것과 같이 항상 시작과 끝이 다른 곳에서 끝나는 속에서, 그것이 아닌 것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가 결코 없는 것(존재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상상은 아니다. 모든 허구는 “있다”(존재)에서 나온다. 유니콘이 뿔 달린 말이고, 용이 뿔과 다리, 수염이 달린 뱀인 것처럼, 없는(존재하지 않는) 괴물을 상상하라 하면 누구나 현실에 있는 것들을 조합하여 상상할 수 밖에 없게 마련이다. 진공에서 양초 없이 타는 촛불을 상상해보면, 그것 또한 공기, 양초, 불과 같은 우리가 아는 것들에서 상상된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없다”는 “있다”에서 상상된 개념이다.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는 “있다”라고 한다. 괴물의 비유에서 보듯이 “없다”,”없는 것”을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한다. “없다”를 상상해 보라고 하면 결국 “있다”를 상상하게 마련이다. 점과 선(길이)의 관계, 그리고 순간과 시간(기간, 한계를 내포한 의미로서 시간) 또한 마찬가지로 “없다”와 “있다”의 관계처럼 서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순간과 시간을 비교해 보았을 때, 죽음의 “순간”은 어떤가? 그러니까, 내가 엄밀하게 죽는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단말마를 내지르는 순간? 아니면 심장 박동이 멈추는 순간? 썩어들어가는 순간? 모두의 기억에서 없어지는 순간? 육신의 썩은 재가 흙이 되는 순간? 아니면, 치매에 걸리는 순간? 죽음을 엄밀한 의미에서 순간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좀 더 엄밀하자면, 죽음이란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죽음의 과정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서 끝나는지 명확히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d)ii.에 따라 ‘나’의 죽음이란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 불명확한 순간(일련의 과정)이므로, 나와 자연의 구분도 불명확한 구분이다. 죽음이 불명확한 것과 같은 이치로, 똑같이 탄생도 불명확한 개념이며, 탄생과 죽음이라는 사건 사이의 시간으로서 삶도 자연과 엄밀하게 구분되지 못한다. 머리카락과 손톱이 떨어지거나 음식물이 근육과 뼈가 되고 노폐물이 배출되는 과정은 그러한 예시이다. 모두 부분이 인간이라는 대상을 구성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명확히 짚을 수 없는 경우들이다. (덧붙여, 신체 뿐 아니라 정신과 아이디어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디서부터 모방이고, 어디서부터 창조일까?)

이러한 “죽음”의 불명확함은 죽음이라는 사건이 불완전한 상상물일 수밖에 없게끔 한다. 동시에, 죽음의 불명확성은 삶과 탄생의 불명확함으로도 환원되므로, 결국 삶과 탄생,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의 집합 위에 서는 인간 스스로가 불완전한 상상물임을 나타낸다. 나아가, 인간과 인간이 지칭한 사건들의 집합이 서기 위해 필연적으로 가정되는 일상적 의미의 시간 또한, 불완전한 상상물임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일상적 의미의 시간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모른 한계는 점,경계,순간과 같기에 인간이 명확히 지칭할 수 없어서이다.

결론 1 : 인간에게 있어 시공간은 점과 순간의 연속체로서 인간이 서기 위한 대전제이다. 이러한 일상적 의미의 시공간은 점과 순간의 연속체로서 불완전한 상상물이다. 이에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상상물이며, 온갖 것/사건들의 집합체이다.

 

전개 2 : 흐름에 있어 태어남과 죽음의 전제

구체적으로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180207
최근에 친구에게 한 이야기에 바탕해서, 대화를 꾸며보았다.

친구 :A 나:B 해설자(나):C

A:1.삶에 의미가 없는 것 같아.
A;2.왜 살지? 의미가 뭐지? 의미 있게 살려면 뭘 해야 되지?
B:이러쿵 저러쿵
A:뭔소리야. 세 줄로 요약해

B:1.”있다”와 “없다”가 있어,
B:2.직관적으로, 그리고 가장 평범한 의미에서, “있다”는 “있다”라고 치자(의심할 대상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다면 “없다”는 “있다”에서 상상한 거야. 없는 괴물을 상상해도 결국 있는 것들을 조합하는 것처럼. 그래서 “없다”를 “없다”로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지.
B:3.근데 “없다”없이 “있다”가 “있다”로 불릴 이유가 없어.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굳이 부를 필요도 없지. 헛수고가 되어버려. 그래서 “없다”가 결국 불릴 수 밖에 없어.

A:무슨 헛소리야. 그게 의미랑 무슨 상관이지?
B:1.(의미가) “있다”와 (의미가) “없다”가 있어. 그리고 결국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의미가 “없다”를 찾아야 되고, 의미가 없기 위해서는 의미가 “있다”를 찾아야 돼.
B:2.”있다” 또는 “없다” 중 어느쪽이 내가 보는 세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려면 어때, 결국 둘 다 부를 수 밖에 없어. 적대적 공생 같은 거야. 지루한 사람들이나 스카이 다이빙 같은 거 하는 거야.
B:3.하지만, 한 쪽만 있다면 헛수고지. 기억할 이유도 없고, 기억에서도 잊혀지지. 그건 의미가 없어. 우리가 하는 일은, 지루한 “이미 있음”의 세상에서 “없는” 의미를 찾아내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불릴 수밖에 없지. 지루한 “이미 있음”이 있기 위해서라도.
C:(그리고 이쯤 쓰면서, 나는 “이미 없음”의 세상에서 “있는”의미를 찾아내는 거야, 라고 말을 바꾸어도 실제로는 똑같은 말임을 알게 되었다. 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A:1.의미의 존재 또는 의미가 의미로서 불릴 이유는 알겠다.
A:2.난 오늘 의미있기 위해 지루한 직장을 그만뒀어.
A:3.그럼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미래에 뭘 해야 할 지 생각해봐야겠어.

B:1.오늘을 살 것이냐, 내일을 살 것이냐. 그것은 <행하고 알 것이냐, 알고 행할 것이냐.>와 같아.
B:2.오늘을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미래를 살기 위해 오늘을 희생하면, 항상 오늘은 없고, 미래도 미래의 오늘이기에, 미래도 없어. 그래서 오늘을 겪어보지 않으면 의미를 알 수가 없어. 알고 하는 것은 로또에 당첨될 운명임을 알고 로또를 하고자 하는 것과 같아. 불가능하지, 가능하다 할지라도 치트키 쓴 게임처럼 재미 없고 무의미해. 그래서 오늘을 살아야 해.
B:3.하지만 눈뜨면 동서남북 어딘가는 바라보고 있듯이, 우리는 미래를 향해 이미 방향지어져 있어. 방향을 애써 지운다면, 어디를 가도 이전에 있던 곳과 다른 의미가 없어. 미래를 살지 않으면 “있다” 뿐인 세상과 같아. 그런데, 무엇을 해도 방향을 벗어날 수 없어. 무엇을 해도 미래를 살지 않을 수 없어. 어떤 일을 해도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말야. 방향이 없는 것도 “방황”이라는 방향이야. 무신론도, 불가지론도 결국 “신이 없다는 믿음, 난 모르겠다는 믿음”으로서 믿음이야. 스님이 되는 것도 결국 “절”이라는 또다른 속세야. 힘은 영원하고, 완성은 불가능해. 고행은 영원하고, 열반은 불가능해.

하지만 믿음이라는 방향이 있기에 그것을 부르짖음이 있지. 완성이라는 방향이 있기에 걸어갈 힘이 있지. 열반이라는 방향이 있기에 고행이 있지.

B:그래서 생각도 하고, 또 해야 해. 오늘도 살고
A:무슨 말이야, 구체적으로 어쩌라는 거야.
B:구체적으로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