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유한성과 무한성의 관계에 관한 단상

*본 글은 2014년 겨울에 <형이상학>과목 기말고사로 썻던 형편없는 글을 오늘(2015년 6월 30일) 고친 글이다. 방학이 시작되었는데도 내가 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평소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잘 담긴 글이라고 생각하기에 올린다. 고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비문을 발견하고 쇼크를 먹은 게 있어서 솔직히 두려움이 크나, 탈고는 나-중에 맨정신으로 계속해야 될 것 같다.

7월 4일, 사실 이 글을 편집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대철학>(이라 읽고 학내 구조조정으로 고대철학 믿 중세철학 수업이 되어버림)의 임성환 선생님에게 필자가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에 대해 말했더니 그것에 관련되어 쓴 글이 있는지 물으셔서, 과거 <형이상학>수업의 기말고사로 쓴 글을 보내드렸다. 그 글을 보시고는 “반으로 줄여라!”라 하셔서, 반으로 줄인 게 아랫글인데, 이 글도 무언가 나사가 빠진 글이어서인지(비문, 논리적 비약, 자의적인 용어 이용 및 해석, 문학적 표현, 문법적 한계 등이라 본다) 다시 고쳐서 보내라 하셨다. 그래서 글을 볼때마다 미래가 컴컴한 느낌이다.

아무튼 글은 다시 수정될 것이다. 미래가 암담하더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도 26살 먹은 대학생으로서 나의 어줍잖음에 부끄럽다.)

스피노자의 유한성과 무한성의 관계에 관한 단상

무한성과 유한성 사이의 전칭특칭 관계와 부정 관계가 서로 충돌하는 모순에 대하여

한양대학교 철학과 윤재현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매개가 필요하다. 명예와 부, 쾌락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통해 나오는 일상적인 행복은 그 양과 질에서 서로 우열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일상적인 의미의 행복들은 한정된 행복이며 일시적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행복을 위해 명예와 부를 추구하는 인간의 목적성이 오히려 행복을 파괴하면서까지 명예와 부를 좇는 인간상을 초래한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스피노자의 이론에서 행복은 선과 동치를 이루는 것인데, 선이 허무한 것이 된다면 선 스스로의 언어적인 의미와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며 사라지는 것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허무한 것이다. 또한 일시적인 행복을 위한 매개(부, 명예, 쾌락)는 매개일 뿐, 그 자체가 선과 악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마음의 동요에 따라”) 선이나 악이 된다. 그렇기에 스피노자는 영원한 행복은 영원한 것에서 시작한다고 추론해낸다. 이것은 인간 세상의 일시적이며 한정적인 것들(가멸적 사물)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동요함에 따라 속성이 결정되는 것일 수도 없다. 따라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선, 또는 선의 원천이다. 스피노자에게 불확실한 선을 찾는 것은 곧 소멸을 택하는 것이고 확실한 선을 포기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살기 위해 영원한 것, 즉 확실한 선을 찾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신이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추론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가멸적 사물과 신은 각각 한정된 것과 한정되지 않은 것이다. 한정된 것을 찾는 것은 한정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A와 -A’와 같이 서로 부정어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신이 사람을 창조하는 것처럼, 한정된 것은 무한한 ‘양’(연장)의 개념 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한정되지 않은 것→한정된 것’의 관계 또한 성립하는 것이 문제이다. 스피노자에게 ‘양’은 무한한 것이고, 한정적 사물들은 그 아래에서 무한한 양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멸적 사물(유한함)과 무한한 것은 서로 부정의 관계이면서 무한성이 유한성의 충분조건인 전칭과 특칭의 관계를 동시에 성립시키는 모순을 갖게 된다. 집합으로 표현한다면, 서로 여집합의 관계이면서 부분집합의 관계가 성립하는 모순적 관계이다.

유한성 무한성

스피노자의 이론에서 영원한 선은 ‘생존’의 동일어가 되어 스피노자 사유의 토대가 된다. 영원한 선은 최초의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비판하는 회의론자들의 논변으로 이어진다. 회의론자들은 최초의 진리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그들은 진리조차 허구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정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가능한 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대상의 존재성이 그것의 진짜 본성에 의해 모순을 함의하지 않는 것”이거나, “우리가 그것의 존재를 허구하는 한 그것의 존재의 필연성이나 불가능성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원인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 안다면 “그것이 존재하게 하는 본성”이나 “존재하지 않게 하는 본성”에 대해 모순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필연적인 것’이나 ‘불가능한 것’으로 불리는 확실한 것이 된다. 회의주의자들이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모순율을 벗어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된다. 곧, 신의 본성이 부정되어 신은 기만자가 되고, 명석·판명한 관념 대신 허구만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신의 본성과 지성의 본성에 일치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은 곧 내 눈 앞의 명백히 실재하는 대상이, 실재가 아니라 내가 허구한 대로 실재한다고 임의의 자유에 의해 승인하는 것이다. 즉, 내가 무엇이 허구인가를 판단하는 사유의 법칙조차 스스로 제한되는 허구가 됨으로서 옳지 않게 되는 자가당착인 것이다. 모순율이 옳지 않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라는 언어적 의미에 달려 있고, 이 ‘옳지 않다’는 스스로 모순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모순에 빠져버리고, 결과적으로 모순율이 옳지 않다는 주장이 부조리한 것이 된다. 곧 회의주의자들의 ‘우리가 오류를 저질러왔던 것처럼, 여전히 오류 속에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지성에 대한 허위가 불가능함이 증명됨으로서 부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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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partan Woman Giving a Shield to Her Son” by Jean-Jacques-François Le Barbier (1738–1826)

모순율은 언어적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말은 상상의 일부이다. 나의 생년월일과 같이 다른 사람을 거쳐 듣거나 제멋대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지각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과 같이 막연한 기억 속에서 나온 지각들에서 많은 개념들이 합성되어 나온다. 언어는 이런 것들의 집합체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언어는 유한한 것들을 긍정적으로, 무한한 것들을 부정적으로 임의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무한한 것은 영원한 진리의 근원이기에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유한한 것은 반대로 일시적이고 명확하지 않기에 부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언어의 본성 때문에 인간이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유한한 것에는 그 반대의 긍정의 형태로 보게 되어 사물의 본성을 언어의 본성과 혼동하게 된다. 이것을 교정하는 것은 곧 지성을 개선하는 것과 밀접하다.

언어성의 혼란을 극복하려면 명석·판명한 정의를 찾아야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명석 판명성은 합성물인 대상의 개념을 쪼개어 가장 단순한 형태로 만들 때 파악될 수 있다. 이것이 ‘정의’이다. 반대로 대상이 막연하게, 전체적으로(generally) 파악되면 실제가 지칭하는 바의 일부를 빠트리거나 초과하고 서로 혼동될 수 있다. 대상의 보편적이지 않은 특징과 관념들은 다른 특징과 관념들을 대표하지 못하기에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정의는 어떠한 대상의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상의 여러 가지 속성, 특징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확실성, 실재성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이것들은 영원한 형태를 기초로, 또 무한한 필연성에 의해서만 귀결될 수 있다. 이를테면, ‘양’의 개념은 선이나 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양의 그 무한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반대로 점으로부터 선이, 선으로부터 평면이, 평면으로부터 입체가 나오는 것은 양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한정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부정적·소극적인(negative) 것이다. 정의는 긍정적·적극적(positive)인 가장 단순한 관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스피노자가 회의주의자를 비판하는 논지에 따라 그 스스로도 역시 자가당착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무한성과 언어성에 대한 고려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무한성에 대한 이야기를 함에 앞서,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허구된 관념의 특징’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이것은 곧 가정과 상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피노자가 허구, 허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문제들에 대해 가정된 것들(‘those things that are supposed in problems’[1])을 이야기하는 57번째 문단에 나온다. 이 부분에서 스피노자는 첫 번째 예로 불타고 있는 초가 지금 불타고 있지 않다는 가정을 한다. 두 번째 예로는 초가 어떠한 물체도 없는 상징적 공간(some imaginary space, or where there are no bodies)에서 불타고 있다는 가정을 한다. 여기서 이 가정들은 각각 기억에서 불, 초, 촛농, 심지, 불을 붙이는 손, 초가 서 있는 촛대 등 가장 단순한 객체들로 쪼개어 회상하여 조합한 합성물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정을 구성하는 쪼개어진 객체들 자체는 실재하는 것이지, 허구가 아니다. 유니콘이나 키메라, 인어와 같은 괴물의 경우도 동일한 원리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괴물들의 뿔, 갈기, 비늘 등 각각의 부분은 실재하는 동물들에서 따 온 것이고, 단순하게 쪼개어보았을 때 실재하지 않는 것을 벗어난 허구에 해당하는 부분이 발견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신화 속 괴물은 단지 자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실재하는 부분들의 합성물이지, 허구에서 기인하는 순수한 허구가 아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하여 질문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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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Life with Mouse and Candle” by Willem van Aelst (1627–after 1682)

여기서 나는 두 번째 가정의 ‘어떠한 물체도 없는 상징적 공간’, 즉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가장 단순한 형태의 존재라고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실재하는 사물들을 하나하나 없애보았을 때 상상할 수 있는 것인데, 아무도 가장 단순한 것으로서 이러한 것을 본 적이 없다. 먼 우주에도 성간 물질이 차 있듯이, 우리가 아는 공간은 항상 무엇인가가 차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 그 자체를 공간의 가장 단순하고 쪼개진 형태로서 보는 것은 인어를 물고기와 사람, 조가비의 혼합물이 아닌 단일한 것으로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그 공간은 식탁이 없음, 의자가 없음, 바람이 없음 등, 여러 가지 ‘없음’이 모여서 만들어진 합성된 개념이다. 나아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란, 결국 ‘무한함’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유한함을 가정하는 순간, 그것을 ‘한정하는 경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경계는 대상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무엇이 있게 되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란, 결국 ‘무한함’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한함은 아무도 본 적이 없기에 그것은 결국 우리가 보는 유한한 대상들을 하나하나 없앰을 종합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한정되지 않은 무한성은 우리가 아는 한정된 유한성에서 상상된 것이다. 만물의 본질적(essential) 근원인 신 또는 본성(nature)이 오히려 유한한 인간 사유의 합성물이 되는 것이다. 즉 무한자는 한정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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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impression of the surface of the distant dwarf planet Makemake” by ESO/L. Calçada/Nick Risinger – Licensed under CC BY 4.0 via Wikimedia Commons –

무한함을 명석하고 판명한 것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합성물로 볼 수밖에 없는 다른 하나의 이유는 ‘무한함’이란 개념의 언어성이다. 언어가 그 본성상 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적 한계 속에서 대상을 정의하며, 언어 속에서 정의될 수 없는 대상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유니콘과 키메라 같은 대상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무지에서 신화가 만들어지고, 알게 되면 신화는 해소되고 언어 속에서 한정된다. 마찬가지로 ‘무한함’의 개념도 언어적 정의이기에 언어의 한정된 구조 속에서 규정지어진다. 그렇기에 ‘무한함’의 개념은 자가당착적이다. 이를 넘어서서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함을 상상하는 것은 회의주의자가 자신의 신적인 임의의 자유에 따라 상상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무한성을 신뢰한다면 그는 그가 비판하는 회의주의자와 다를 바가 없다. 언어성을 넘어서는 실재성을 상상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비판될 수 있다. 우리는 언어성을 뛰어넘는 신의 본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신은 필연적인 것, 불가능한 것의 형태 이전에 가능한 것이라는 허구 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스피노자가 모순에 빠진 것이 회의주의자들의 논변이 옳다는 반증은 아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한함은 유한함의 부정어이다. 부정하는 것은 어떠한 ‘정의’라는 한정함을 인정하고, 그 정의의 바깥을 지칭하는 것이다. 무한성은 유한성을 인정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이기에 무한성은 유한성의 필요조건이며 동시에 둘은 부정의 관계에 속하게 된다. 무한성과 유한성의 관계만 뒤바뀐 채 앞에서 본 모순이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모순율이 언어의 유한함 아래에 있기에 지성은 모순율이라는 ‘선입견’으로 제약되어 있는 것이다. 즉, 지성은 본성적으로 모순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선입견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야기는 맹목적인 실존과 같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경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눈을 뜨면 얼굴이 방향 짓는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눈을 감더라도 암흑을 보게 된다. 바라볼 대상을 설정한 다음에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봄 다음에 대상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것 또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이야기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 이전부터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언어다. 언어, 언어성은 맹목적으로 존재한다. 설령 침묵뿐이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언어, 즉 이야기이게 된다. 침묵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에 ‘이야기한다’의 부정어로서 이야기함이 있음 다음에야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앞에서 본 무한성과 유한성의 관계와도 동일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맹목성은 옳고 그름, 즉 확실성과 불확실성을 판단하기 위해서 먼저 전제될 수밖에 없기에 이러한 모순에 권위를 부여한다. 이 권위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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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a Monastery25” by Antoine Taveneaux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전칭과 특칭 관계가 서로 부정의 관계가 되는 모순은 최초의 본질(essence)이 있다는 스피노자적 가정 하에서는 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시작하는 지점은 하나의 유한한 끝이고, 그 이전의 본질이 없다고 맹목적으로 가정한 뒤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정의는 주어(subject)와 객어(predicate)의 연결이다. 주어와 객어의 연결은 개념이고, 개념이 있으면 수단과 원인, 즉 모순율을 가릴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최초의 본질이 위치하는 자리에는 주어가 위치하였다. 예를 들어, 유한자나 무한자, 또는 나의 이성, 신, 이데아와 같은 것들이 위치하였는데, 이들은 ‘주어’이기 때문에 언어적 구조의 한계 속에서 ‘객어’라는 속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최초의 본질은 어떠한 속성을 가지게 되어 한정되는 것을 언어적으로 강요받았다. 하지만 언어 즉, 이야기는 주어와 객어이전에 있는 지향성이기에, 이것이 최초의 본질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을 때에는 주어-객어의 한정적인 관계를 앞서게 된다.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무엇’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음’ 다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규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대화를 하지 않으면 따질 수 없는 것이다. 있는 대상과 그것의 속성의 연결인 모순율은 ‘있음’ 다음의 문제가 된다. 나와 너[2] 사이의 이야기라는 본질 아래에서 모순율은 반드시 성립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무한함은 인간의 언어성에 갇혀 유한하고 상상된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로 인해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위급한 생존의 문제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인간 생존의 문제는 천국 또는 유토피아와 같이, 언어적으로 상상된 영원한 행복을 찾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이는 모두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듣고 이야기된 것들을 조합해서 상상한 합성된 세계일뿐이다. 위급한 생존의 문제는 나와 너, 또는 나와 나의 인생, 나와 사회와 같은, 나와 나의 이야기 상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위에 있을 뿐이다. 이야기가 세계의 유한함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한정적인 수단에 의해 유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이야기의 매개를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으며. 인간의 행복에 대한 갈망처럼 이야기는 맹목적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일상의 유한한 것들을 고민할 수 있고, 우리의 세계에서 삶을 충실히 누리는 것이 곧 위급한 생존의 문제에 대응하는 유일한 길이다.

반대로 영원한 행복을 좇을 경우, 무한성이 유한성이 합성된 개념이듯이, 영원한 행복이 있지 않음을 마주하여 슬픔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생존과 죽음 사이의 관계와도 같다. ‘무한한 삶’이라는 개념은 유한한 삶의 반대 개념을 가정하여 상상한 무한성과 같은 합성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예정된 유한성을 직시하는 것으로 인하여 확실한 행복과 확실한 삶을 포기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지는 않는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태어남은 다른 사람을 거쳐 듣는 것이거나 제멋대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기호로부터 얻는 지각이며 죽음은 막연한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지각이다. 이러한 막연한(general) 지각은 명석·판명하지 못한 관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러한 지각을 통해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기에 이런 지각양식은 선택해서는 안 된다. 태어남과 죽음은 확실히 그 경계가 분명하지 못한 관념이다. 일례로, 심장이 멎었다가 다시 뛰는 사람이나, 뇌사 상태의 사람을 두고 그가 죽은 상태인 산 상태인지를 논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조금 더 엄밀해진다면, ‘만일 내가 손을 잘랐다면, 나는 내 잘린 손만큼 죽은 상태인가?’하는 질문 또한 답하기 애매하다.

따라서 태어남과 죽음은 그 정확한 지점을 말할 수 없는 것을 언어적으로 약속된 한정의 규칙에 따라 규정한 것이다. 분명하지 못한 한정의 경계를 보아, 삶과 죽음은 명확히 구분되지 못하는 하나의 흐름 또는 과정이 된다. 그래서 삶을 사는 것은 죽음을 죽어가는 것과 동일어가 되고, 경계가 분명하지 못하기에 무한한 것이 된다. 그러나 무한함은 삶, 또는 죽음이라고 언어적으로 제약되어 불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동시에 유한한 것이 된다. 유한성과 무한성의 모순적인 공존은 만물 유전(panta rhei)하듯, 죽음의 ‘피할 수 없는 종말’의 권위를 박탈하여 이를 ‘피할 수 없는 생존’의 권위로 치환한다. 유한한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하는 맹목적인 당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언어는 삶과 죽음이라는 하나의 과정을 두 가지로 부르며 삶의 무한한 속성과 죽음의 유한한 속성을 함께 지향하는 맹목적인 경향성이 된다. 이는 마치 ‘도’가 ‘도’라고 언어적으로 규정되면 ‘도’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도’는 그 자체를 언어적으로 규정될 수 없지만, 언어적으로 규정될 수 있기에 지향 가능한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도’를 정확하게 언어적으로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도’가 맹목적으로 지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말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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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맹목성은 나와 너라는 대상을 설정하기 이전부터 존재한다. 마치, 내가 먹은 영양분이 내가 되는 엄밀한 지점과 그것이 분뇨로 배출되는 엄밀한 지점을 말할 수 없고, 내가 내 몸을 움직이지만 내가 쥔 연필과 심장, 감정은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유물론적인 사고는 삶과 죽음의 구분에서 보았던 것처럼,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야기의 경향성 아래에서는 나와 너가 언어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때로 나무나 선돌이 인격체 취급을 받고, 금전이 사람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나’라고 언어적으로 한정되지만 엄밀한 구분 이전의 무한한 형태로서도 공존하게 된다. ‘나’는 나와 너 사이의 대화 속에서 구성된 것이지, 신적인 사유의 자유를 갖는 인격체가 아니다. ‘나’는 맹목적인 이야기 기계이면서 동시에 이야기 기계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산출물이다. 나는 이야기 그 자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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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ussing the War in a Paris Café” by Fred Barnard (1846–1896)

‘나’는 세계 내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본질적으로 세계에서 동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모든 것은 ‘나’와 같은 개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여론’ 또는 ‘상식’과 같이 거대해진다. ‘여론’과 ‘상식’은 엄청나게 많고 다양하여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의견들인 동시에, 이를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가지 경우로 이야기 속에서 언어적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론’과 ‘상식’은 무한성과 유한성을 동시에 가진다. 상식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것이 내뱉어지는 순간 여론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맹목성이 ‘여론’이라는 의견의 수렴과 발산 과정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보편성의 맥락 위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진보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끊임없이 계속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1]지성개선론 국문판에는 ‘논쟁의 경우 세워지는 가설’이라 번역되어 있다.
[2]편의상 나의 이야기상대 역할을 하는 것을 모두 ‘너’라고 부르고자 한다.

산 위에서 소리지르기.

예전에 신입생 시절에 중국에 간 적이 있다. 무슨 신입생 단기 교환학생/어학연수 프로그램이었다.

흔한 대학교 국제협력처 프로그램들이 다 그렇듯이(우리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다수의 학교가 그렇더라.) 학생을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해외에 보내는 것만 신경쓰고, 학생이 해외에 가서는 무엇을 하는지 형식적인 보고서만 제출하면 되는 예산낭비프로그램이었다. 아무튼, 가서 왠지 모를 우울함에 빠졌다.

그래도 핵심은 기억한다. 그 때 느꼇던 것의 핵심은, 낮선 땅에 가는 것이 낮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일상으로 빠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새로움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 그 공허함은 세계 여행의 로망에 빠져 있던 내게 나름 큰 충격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경험 에서부터 일상적인 것에 침잠하고자 하는 가치관이 시작된 것 같다. 캐나다에서도 그렇고, 뉴욕에서도 그렇고, 랜드마크를 찾으러 다닌 적이 없다. 허무할 것이 뻔하기에…

여행의 껍데기를 한 꺼풀씩 벗겨내어 보면 그 핵심은 “의미부여”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일상 또한 “의미부여”과정이다. 다만, 일상의 ‘의미부여’가 잠시 어려운 시간을 곀고 있을 때, 일상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의 본질로 직진해보는 것이 여행인 것 같다. 내가 여기 있음을 뇌리에 각인시킨다고 해야할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 전체가 여행이라 생각하고 살아야 되는 듯 보인다. 사실 둘 사이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시 중국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우울함 속에서 문득 소리질러보고 싶었다. “으아아아! 하고 나를 제약하는 세속적인 것을 모두 벗어나보고 싶었달까, 무슨 스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가지 않는 그 촌동네 동네 앞산에 올라가서 소리를 빼애액 질렀다. 그런데 그렇게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 그게 일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마치 시소위에 서 있는데, 가라앉기 싫어서 반대편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니 땅바닥을 벗어나면서 다시 땅바닥으로 돌아왔달까.

그래서 어떠한 경험에도 일상을 벗어나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내일 전쟁이 터지든, 사후세계를 여행하든, 쥬만지 속에 들어가든, 나는 연속적인 나의 인생속에 있다. 열반은 없다! 여행하는 사람은 절대 낮섦을 기대하고 낮선 의미를 찾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 지금 나는 내가 쓴 바보같은 글을 고치고 있다. 고치면서 내가 글도 잘 못쓰고, 말도 조리있게 못한다는 걸 다시 곱씹고 있다. 글을 수정하는 데 한계;무능력함을 이렇게 많이 느껴보는 건 이 글을 처음에 썻을 때 이후 두 번째다. 주먹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쥐어박는다던지 책상을 뒤짚어 엎는다던지, 카페베네 한복판에서 빼애애액 소리지른다던지 하고싶은 건 많지만 하고 나면 그 부끄러움이 내 일상이 되어버린다고 곱씹어보고 있다. 중국에서 그랬듯이…

아무튼 글 다 써야된다. 철학과 4학년생으로서 더 이상 멍청하고, 느려터지고, 비문 투성이인 “불어터진 국수”같은 글은 쓰고싶지 않다.

부끄럽다 부끄러워…

Up in the air…

계속 허공에 붕 뜬 느낌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허공에 붕 떠서 살아가려면 돈이 많아야 된다.

계속 비행기를 타야 되기 때문이다.

만약 돈이 없다면 땅바닥에서 기면서 살아가야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정도 형편이 된다면 허공에 붕 떠서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건 이카루스의 날개와 같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날개가 녹아버리고

마주하는 현실의 땅바닥은 너무 가혹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내가 너무 무섭다.

작년 9월 몇 주 동안 그린 게임 팬아트들

내가 나름의 자부심을 갖는 이유는, 마우스와 그림판으로만 그렸기 때문.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트릭이 필요한데,
1. “붓”포인터를 이용할 때는 붓글씨를 쓸 때처럼 가는 쪽이 오는 위치를 생각하며 그려야 한다.

2. 그림을 한 3000 x 3000 사이즈로 설정하고 그리다가,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Ctrl+스크롤 로 확대보기, 축소보기를 하면 된다.

3.그리고 있다가 우클릭을 하면 그리던 획이 취소된다. 시간 절약 및 손 길들이기에 좋음.

아래 그림들은 클릭시 확대해서 볼 수 있다!

trundle
veigar feeling rorchach

왓치맨을 섞어보았다. 왠지 베이가와 로어샤흐의 그것이 서로 비슷한 것 같아서.
corki

고르바쵸프를 생각하며 그렸다.
cpt teemo
트런들 축소

이건 그리다 보니 조금 어긋난 것 같아서 그만두었는데, 계속 그렸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 2월에 그린 것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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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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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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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에. clps
이건 뉴욕 브롱스에서 찍은 것들인데… 아 미국 여행(?)기도 써야 되는데.
탐방기라고 하는 게 더 맞을것도 같다. 여행이라기엔, 풍경을 보러 다니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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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그래피티 사진들은, 다음에 탐방기 올리며 자세히 올려 봄.

캐나다에 있을 때 그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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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완성했으면 좋았을 텐데,

올 방학 목표는 도림천에 검은 페인트 한 통, 락카 한 열 개쯤 들고가서

그림하나 그려보는 것인데, 잘 할지 모르겠다. 힘조절이 워-낙 잼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