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나, 죽음 : 주어 없는 술어(2016년 9월 6일의 생각)

2016년 9월 5일 월요일 윤재현의 생각

1. 지난 몇 달 동안 생각했던 게 많긴 많았다. 헝클어진 실타래 같긴 했지만.. 그중에 하나를 꼽자면, 그것은 죽음이었다. 좀 웃기긴 하지만, 어쩌다 보니 매일매일 “인간은 죽는다”는 걸 생각했다. 내가 오늘 이 주제를 어거지로 글로 토해놓는 까닭은 그러다 재미있는 도식이 생각났기 떄문이다.

2. 하지만 이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해야 할 주장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생각은 도화지이고, ‘나’는 그 위에 그린 그림과 같다.>이다. 이 문장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생각하고,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나’와 상관없이, 이미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나’가 있다고 말하고, 고로 ‘생각’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그럴듯할 것이다. 나는 과감히 <일상적인 의미로서의 ‘나’>에게 소유된 것으로서의 ‘생각’이라는 통념을 반대로 뒤집어 보려는 것이다. 생각은 통제할 수 없는 급류와 같고, 나는 그 위를 떠다니는 뗏목과 같다. 생각은 ‘나’보다 상위에 있는 개념이 된다. 내가 내 생각을 보고, 손에 들고 걷는 게 아니라, 생각이 두 눈으로 나를 관찰하고 나를 두 손으로 업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한번도 생각을 멈추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생각을 멈춘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는데, 조금 후에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누군가는 <일을 하면 생각이 없어지지 않는가?>, <멍때리는 것이 곧 생각이 없는 것 아닌가?>, <잠을 자면 생각을 안하지 않는가?>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정, 느낌, 충동을 포함한 큰 개념으로서 생각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잠을 잘 때도 꿈을 꾸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생각이 언제가 거기 있었고 멈출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생각을 나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라 단정짓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 그러하다면 나와 생각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만약, 생각을 ‘나’에 앞서는 것으로 말한다면, 나의 의지와 자유는 허무맹랑한 것이 되고, 나는 그저 생각하는 기계에 불과하지 않을 것이다.

3. 하지만 나는 한가지 더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한 이유는, ‘나’를 엄밀히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일년간 줄곧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해 왔다. <’나’를 정의하자면, 나의 신체나 그에 속한 정신, 혹은 내가 남긴 말들로 국한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오히려 나와 너 사이, 또는 사람들 사이에 떠 있는 공기와 같은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문학 작품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이라는 도식과 궤를 같이한다.

내가 알기로, 가스통 바슐라르는 <문제틀>(problematique)라는 개념을 통하여 질문과 대답에서 대답은 언제나 질문에 의해 이미 한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가령, <그 사탕은 무슨 맛이니?>라고 물었을 때, <보라색 맛 났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라마찬드란이 언급하는 공감각적 지각을 가진 이들이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단 맛, 짠 맛, 쓴 만 등의 집합으로 대답은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질문들 또한 질문자가 이전에 들었던 대답이나, 질문자가 알게 된 지식, 질문자의 환경 등에 의하여 특정 집합으로 제한되고 유도되고 있다. 이러한 식으로 말하다 보면 아무것도 그 자체로 온전히 독립되어 서는 것은 없다. 나의 성격, 나의 가치관, 나의 생각 들을 상대방에게 말할 때 이미 상대방의 질문에 의하여 특정한 모양을 쥐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의사소통 과정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반대로, 나와 이야기하는 ‘너’ 또한 마찬가지로 ‘너’의 신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대화 속에 존재한다. (이렇게 되면, 나를 이야기하는 것은 곧 너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너를 이야기하는 것은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곧 너와 떨어질 수 없는 개념이 된다)

가령, 다들 이런 경우가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친한 고등학교 친구들 앞에서는 욕설을 섞어가면서 이야기하거나, 음담패설을 마구 이야기하다가도, 대학교 친구들 앞에서는 고상한 사람이 된다던지, 남동생 앞에서는 만사 귀찮은 누나인데 남자친구 앞에서는 내조의 여왕이 된다던지, 내가 어떤 집단에 속했는지에 따라 내가 쓰는 성격의 가면도 변하는 경우 말이다. 넓은 형태로는 ‘존대법’과 ‘예의’ 또한 이에 속한다. 나이 차이가 많은 경우에는 깍듯해지다가도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않을 때에는 편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속성이 다른 집단의 구성원이 삼자 대면을 하게 되었을 때, 다들 어떤 가면을 써야 할지 곤란해진다. 가령, 빠른년생의 대학교 친구(존댓말, 형-동생 관계)와 고등학교 친구(반말, 사실상 동갑)가 그렇고, 그 외에도 본인이 서로 이질적인 성격으로 마주하던 사람들이 모였을 때는 자기 친구의 다른 모습을 보고, ‘얘가 왜 이렇게 변했지? 내가 이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되지?’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나’라는 개인은 오로지 그가 어디에 속해있냐,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이미지가 된다. ‘나’는 그러한 배경무대를 제하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4. 이는 나의 정신적인 부분에만 국한하여 말하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체적으로도 다르지 않다. 아주 단순한 예부터 살펴보다. 내가 방금 손톱을 조금 잘라내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여전히 나의 일부인가?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나’의 일부가 아니다. 이를 역으로 돌려보면, 태어났을 때의 우리는 2-3kg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지금 60kg 정도의 몸무게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58kg의 차이는 그저 살덩이에 불과할까?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어머니가 나를 품고 있을 때 “여보야 나 오늘 치킨 먹고 싶어”라고 말하고 뜯은 수많은 닭의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허황된 예시라고 한다면 아직은 달리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엄밀하게 볼 때, 나라는 신체적 경계는 불분명하다. 미토콘드리아는 원래의 독립된 생물로서의 기능을 스스로 퇴하한 신체 내의 공생체라는 설이 있다고 들었다. 그 외에 신체 내의 수많은 미생물들은 우리 몸을 건강히 유지시키는데 일조한다고도 한다. 또, 매 순간 신체의 일부는 재생산되고 피부 세포는 떨어져 나간다. 그냥, 당신이 소화시키고 있는 음식물을 정확히 어느 순간부터 당신의 신체의 일부라고 정의내릴 수 있겠는가? 이러한 정의는 불가능하다.

신체 외부의 의복, 주거지, 직업 등의 외부 조건 또한 이러한 면모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령, <미녀와 야수>, <개구리 왕자>, <암행어사 이야기들> 등을 보면, 어떤 이가 그의 생김새, 의복, 조건 등만 변화시켜 나타났을 뿐인데 그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상대방이 대응하게 된다. 분명히 신체 등의 물질적 부분은 의사소통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고, 그 말은 신체와 정신은 어떠한 한 가지 실체의 두 가지 양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산의 생김새가 달라 보이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5. 시간적인 연속체로서의 ‘나’ 또한 살펴보고 싶지만 이는 오늘 밤의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다. 그저 갓난아기때의 당신이 뭔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생각할 수 있는가? 청소년 시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를 모두 ‘단일체’로서의 나라고 볼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해 보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감을 잡을 것이다.

6. 아무튼, 즉, ‘나’는 불명료하다. 그렇지만 ‘나’는 ‘나’로서 불릴 수 있고, 이것은 부당한 것이 아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있다’(존재)와 ‘안다’(지각)은 같은 말의 두 가지 다른 형태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 했던 “있다”와 “없다”로 나뉜다는 이야기를 부정하고, “있다”와 “모른다”가 있을 뿐, “없다”는 거짓이고, 우리가 말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은 또 유한성은 인정하나, 무한과 영원, 불변함을 부정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외에도 이 이야기는 여러가지 다른 주제로 논해질 수 있지만 다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을 추린다면, ‘나’는 불명료하고, 온전히 나로서 독립되거나 나의 통제 하에 놓이거나 소유되는, 온전히 나에 의하여 결정되는 의지를 가진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이며, 나는 여러 이미지를 모자이크 해 놓은 것 같은 집합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은 나보다 상위의 개념이지, ‘나’의 존재 아래에 소유된 무언가가 아니고, 그 역의 관계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즉, 생각의 도화지 위에 ‘나’를 그리는데, 이는 나, 너, 가족, 친구, 적, 선생, 군중, 환경 등 많은 것들이 각자의 크레파스를 잡고 함께 그린 그림에 가깝다. 그 크레파스는 ‘질문’, ‘대답’, ‘소통’ 등의 이름을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생각은 온전히 ‘시간’의 다른 이름일지도 몰라.

7.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와서, 내가 생각했던 재미있는 도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는 2012년의 칸트, 인식론를 배우던 언젠가를 회상한다. 강의가 너무 재미없어서, 솔직히 들은 것은 극히 적고 기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이 때, 강의를 그나마 이해해보고자 알고 지내던 형에게 강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했었다. 그 질문들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던건, <주어와 술어>이다. 그 형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로서 그 강의 내용의 핵심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대해 오만하게 시도했던 생각은, <만약 주어가 없다면?>이었다. 주어 없는 술어를 생각했다. 그 때 내가 만들었던 문장은 “이것이 있다”가 아니라, “있다” 였다.

그리고 오늘, 내가 생각할 때, 나는 4년 전의 이러한 물음이 죽음의 문제와 큰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가령, 인생을 묻는다면 “내가 사는 동안 무엇을 하면 의미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답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죽음은 이 질문의 “내가”를 소거시키기 때문이다. 질문은 “무엇을 하면 의미 있을 것인가” 가 된다. 이 질문은 결코 “<내가> 무엇을 하면 의미 있을 것인가”를 더 이상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가 소거되면, 의미 있는 ‘무엇’은 목적어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활과 화살은 그대로인데, 활잡이가 사라지기에 과녁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답없는 상황인가? 내가 아는 한, 많은 사람들이 이를 회피하는 방식은, <내가> 자리에 <세계가>, <너가>, <내 후손이>, <지구가>, <평화가> 등의 목적어를 넣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주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주어를 없애버리고, 술어만 단독으로 남겨놓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이러한 생각을 하며, 이런 쪽으로도 생각하였다. 질문을 더 간단한 형태로 만들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예를 생각하였다.

  • 나는 의미있는 일을 한다/의미있는 것이다/의미있다 -> 의미있는 일을 한다/의미있는 것이다/의미있다.
  • 나는 생각한다 -> 생각한다

여기서, 생각해보니, 나는 항상 화살표 이후의 형태를 자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상황이 긴박하거나 현실적인 문제들과 맞닿아 있을 때는 꼭 전자를 생각했던 것 같다. (가령, 평소에는 “의미 있는 일을 하자, 그게 뭔 진 모르겠지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시험공부 한 것이 기억이 안 날때는 “재현아, 생각하자, 생각하자, 넌 기억할 수 있어”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의미있다”, “생각한다”라는 말은 너무나 단순한 말이고 아무 데나 쓸 수 있는 말이면서도, 엄밀하게 생각하기엔 복잡해 보인다.

 

결)  아이고, 더 말을 풀어내기엔 막다른 길에 몰린 것 같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나저나 시간이 쪼들려 글이 뒤로 갈수록 헝클어져서 안타깝다.

+ 사실, 나는 태어남과 죽음이란 음식물이 소화되면서 살덩이로 변하는 순간을 명료히 짚어낼 수 없듯이, 정의 할 수 없는 불명료함으로 파악해왔다. 간단히, 누군가 “에이, 살기 팍팍하면 대출 10억쯤 떼서 한 달 안에 할 수 있는 거 다 하고 죽지 뭐, 죽으면 다 끝나잖아!”말을 했을 때, 나는 ‘죽는다고 내 상황이 끝난다고? 그런 건 없어.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죽는다고 내 고통이 끝나는 것은 절대 아니야”라고 대답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러한 생각을 배제해 두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니까, 방금 내가 말한 것을 연관하여 생각하면 또 다른 생각이 도출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주어의 소거>로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주어의 불명료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브라흐만 신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꼴이 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신의 무한을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무한이란 실제로는 인간이 유한함을 보고 상상한 것이며, 그 상상조차 유한함이라는 개념으로 한정되어 있기에는 실제로 유한한 형태의 무한함일 뿐이다.(이게 무슨말인지 이해가 안 가도 된다. 오늘은 이에 대해서 안 쓸 거니까)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일종의 모순에 빠져버린다. 다음에는 ‘무한’에 대해서 글을 써봐야 겠다. 그래야 다음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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