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행동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귀를 하나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나는 사르트르의 <구토>를 앞 부분만 간신히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 대목을 인상깊게 기억한다. 첫째는 롤르봉이 공포로 지식인을 설득한 것, 둘째는 트럼프 치는 인물들을 영혼없이 묘사하는 부분이다. 그 중 롤르봉의 일화를 그대로 소개한다.

‘1787년에 물랭 근처의 어떤 주막에서 디드로의 친구이며, 철학자들에 의해서 교육을 받은 한 노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근처의 신부들은 지쳐 있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노인은 종부성사를 거부했다. 그는 범신론자였던 것이다. 드 롤르봉씨가 거기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신앙이라고는 갖고 있지 않았으나, 물랭의 신부들에게 병자를 기독교 신자의 감정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자기 같으면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내기를 했다. 신부가 내기에 응했다가 졌다. 아침 3시에 시작해서 병자는 5시에 고해를 하고 7시에 죽었다.

<당신은 토론의 기술이 능하십니다그려. 우리는 어림도 없습니다.>라고 신부가 말했다.
그랬더니 드 롤르봉씨는 대답했다.
<나는 토론을 하지 않았지요. 지옥이 무섭다는 것을 말해 주었을 뿐이지요.>’

사람은 공포로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오늘 공포로 움직였다. 합리적이지 않음은 질책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합리성은 언제나 공포 다음의 일이다.

왜 그러한가? 모든 결과/대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유를 설명해야 하게 마련이고, 그 원인/이유 또한 그 위의 원인/이유를 묻게 마련이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정은 <이렇게 원인을 찾는 것은 영원할 것인데, 영원히 계속된다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하게끔 만든다. 여기서 그것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고, 이 질문은 그것이 의미가 있을/없을 대상인 나 자신을 상정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겠다.

바로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할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는 나의 실존/내던져짐/현존재/있음에 대해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끝나지 않는 고민을 누군가는 고통이라고, 누군가는 공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엔 고통은 일정한/정적인/연속적인/선형적인 흐름으로서 존재상태를, 공포는 강조점 있는/동적인/무게감있는/사건위주의 점으로서의 존재사건으로 묘사하겠다.

그래서, 공포는 하나의 사건을 만들고, 나의 삶에 일정한 변곡점/변화의 포인트를 준다. 공포는 그것을 헤어나오고자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하게 만든다. 실존은 의미를 갈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의미를 갈구하는 것은 의미를 다른 이에게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달하거나 강제하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상태이다. 실존에 내재된 이러한 의사소통의 피할수 없는 폭력성은, 다른말로 한다면 인간의 모든 관계가 폭력을 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포 때문에 그 폭력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관계를 유지한다. 관계 없이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의미를 갈구하지 않으면 내 스스로의 존재감(자존감/실존)을 불편하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간정리하자면, <인간은 사회적이다>는 <인간은 폭력적이다>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사회는 공포 속에서 그 불편함을 극복하며 존재하게 된다. 그 구성원들의 실존/자존감/정체성을 만족시키면서.

추신) 다른말로 하면 공포-의미의 갈구는 곧 믿음의 갈구와 같다. 사회는 믿음의 공동체이고,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사상/종교를 피할 수 없다.(아 그리고 난 크리스트교인은 아니다. 오해할까봐.)

이 글은 오늘 내가 새로운 모임을 시도하였고,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고, 그 모임이 어느정도 불편했지만 계속 시도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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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2

1.인공지능은 빅 데이터(많은 양의 정보)+고성능 하드웨어(비싼 장비)+그리고 머신 러닝 알고리즘(배우는 능력: actual tasks를 formal tasks로 변환해 적당히(approximately) 처리하는 건가?) 로 가능하단다.

즉 경험+경험을 소화할 시공간적(?) 역량+경험을 해석하는 능력(뭐라해야 되지… 경험 해석의 높은 유연성? 깊은 해상도?) 이 필요하다는 건데

참 사람을 본따서 만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Actual Tasks를 Modeling을 통해
(사람과 나름 비슷하게) Formal tasks로 변환한다는 부분도 재미있었다.
Actual Task를 바로 프로그램해버리면 정확한 결과가 나올 테지만, Formal Task로 변환해서 프로그램한다는 것은 최대한 근접하게/적당히/통빡으로(approximately) 처리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문제에 뛰어들기 이전에 두가지를 가정한다.(사실 한 가지)

1)정확한 문제 해결을 하기엔 주어진 시간 역량 (마감기한)이 너무 적다.
2)정확한 문제 해결을 하기엔 주어진 공간 역량 (컴퓨터 성능/인간 두뇌)이 충분치 않다.

즉, Formal Task가 Actual Task의 차선이라고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Formal Task는 정밀성을 버리고 대신, 더 많은 변수에 대응하는 길에 가깝다.

그러고보면 사람이 Formal하게 일을 바꾸어 처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컴퓨터야 누군가 Task를 투입해 준다지만.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이 Task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제(task)를 y=f(x)의 x라 하면 x가 얼마나 시간, 공간적으로 큰지를 사람은 그저 “모른다”

더 나아가, 컴퓨터와는 달리 y=f(x)부터 스스로 구성해 내야 한다…? 아니면 먹지 않으면 생존 불가하다는 사실이 y=f(x)를 만드나..?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생각하지 못한 영역이라 다음에 이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