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 Economic Liberalism in China cause Political Liberalism?

Will Economic Liberalism in China cause Political Liberalism?


*I am writing this after reading China’s Great Leap Backward by James Fallows, which is published in the Atlantic Magazine.

Yoon, Jaehyun

revised at Feb. 20th 2017
writed at Jan. 5th 2017


Skeptism against Liberalism

Some of researchers claim in Liberalism, if a, politically, non-liberal state is weaved in Global free market, then that state will be politically democratic in some point. However, Current International system seems changing from one-polar to multi-polar, and from free market to mercantilism. So Political Realism is concerned more persuasive. Maybe great failure in Syria and Iraq, issue of Grexit and Brexit is relevant with the skeptism against Liberalism.

One of hot argument in this issue would be china’s case. China is being richer and taking more important role in the global economic system. Surely China is changing its economic system as liberal system de facto. But it does not mean China is being politically democratic. China’s tendency would be much more related with sustainability of Chinese government and its system. Because escaping poverty is prior factor of survival. Skeptical view is being concluded as “if poverty is overcome, then people are going to be not angry enough to be eager for democracy.”

Ping Pong diplomacy

Current Sino-American relation is based on Nixon-Kissinger’s diplomacy in 70’s which is called “Ping Pong” diplomacy. Major goal of Ping Pong diplomacy was separating China and Soviet Union and isolating Soviet Union. In 60’s and 70’s, China wanted to be fair, equal and more independent from Soviet Union. In other hand, Soviet Union wanted to get more control and influence on China.  This discord had grown as Sino-Soviet conflict; border dispute. By it being revealed in America, America alternated the role of Soviet as economic supporter on China by Ping Pong diplomacy, and as China, there was no reason to be hanged with Soviet Union.

Nowadays, the situation is changed. America wants to get the power by isolating its rival. In the Cold War, the rival was Soviet Union but currently main rival of America is China. This is why America preferred to get better relation with Russia, and making distance with China. Recently Henry A. Kissinger also said he advised to Donald J. Trump in this point.

The Dispute of Revisionism

Sino-Soviet conflict is also grown from “dispute of Revisionism” between Khrushchev and Mao. This dispute occurred by the succeeding secretary, Khrushchev criticized Stalin’s work. Stalin tried to make centralized system, and it created his dictatorship and heavy industry. On the other hand, Khrushchev wanted to build more decentralized and autonomic system. It increased production of light industry.

China was against Khrushchev’s action. And it came as Maoism, Great Leap forward, and the Cultural Revolution. These were centralized, more Stalinized movements of China in Mao’s era. But China did not stuck in the old Communism. Deng Xiaoping and his policies were the antithesis of Mao. Nevertheless, Tiananmen Massacre in June 1989 shows China’s centralized tendency. This has the same side of the character of Mao’s regime. Under these points, I assume the hypothesis that China is being more centralized when the foreign relation gets more strain.

In the same vain, In the contemporary China, the chairman Xi is driving the cleanup of his political rival, the control in media, and the prasing of its own regime under the strain with U.S. and other rival states, such as Japan. They are doing similar role of USSR in Sino-soviet dispute in 60’s. However, as Deng did in the economic area, this regime is chasing for the throne of Free-Trade-Dominator. Nov. 19th, 2016, Chairman Xi called for Free Trade and FTAAP as economic globalization falters, and rise of protectionism. but it is calling in power game with U.S. against Trump’s move in protectionism. If so, this would scarcely mean Liberalism of China, rather be close to precarious Libertinism of the world.

China’s Great Leap Backward?

In Conclusion, I think China and the world is going backward if we concern affects and aspects in international politics. At least there is no reason that let us believe the world is naturally going for Liberalism. It would be better close to multipolar system in Realism.

But this is in only thinking in international politics. What I want to claim is, there is no ‘natural’ reason and relation to go Liberalism and Democracy by effects in international politics. I still want to open possibilities in domestic and civil scale, which is not related with international scale. It is because the identities of the Chinese people are, inevitably, changing. And this identities are not about information based on global standard, but something more like briskness of action even under constant amount of information, I hasty guess.

브레즈네프 시기의 정치권력 강화와 경제 침체

브레즈네프 시기의 정치권력 강화와 경제 침체



1.    서론

2.    브레즈네프의 인물상

3.    흐루시쵸프 축출과 브레즈네프의 권력 장악과정
–  A. 흐루시쵸프 축출  –  B. 브레즈네프의 권력 장악과정

4.    브레즈네프 시기의 정치 변화
– A. 발전적 사회주의론
– B. 재 스탈린화 정책 (restalinization)
– C. 반체제 운동

5.    브레즈네프 시기의 경제정책 변화와 침체
– A. 코시긴의 경제정책
– B. 브레즈네프 권력집중기의 경제정책과 침체

6.    결론 – 개혁의 실패에 대한 조합주의적 분석과 의의


  1. 서론

러시아 개혁논의는 억압과 착취 구조의 탈피하려는 욕망으로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러시아 인민의 방향성은 이중 멍에(double yoke)를 피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가령, 인민주의(Narodnichestvo – the Russian Populism), 회피원칙(avoidance principle), 도약 이론(jump theory)에서 보이듯이[1], 서방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의 현실에서 짜리즘(Tsarism)적인 정치적 억압과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억압을 모두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브레즈네프 집권기는 소련의 암흑기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시기로 평가받고는 한다. 하지만, 브레즈네프 시기의 소련사회는 경제적인 개혁의 필요성이 분명히 제기되고 있던 시기이며, 그러한 부분에서 정당성 없이 브레즈네프의 집권기가 등장했을 리는 없다. 브레즈네프의 개혁과정 또한 러시아 개혁 역사의 거대한 흐름의 일부분으로서, 이중 명예의 양쪽으로 동시적으로 분석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첫째로는 스탈린주의적인 중앙 관료주의를 짜리즘적인 정치적 억압으로 볼 수 있다. 흐루시쵸프의 반스탈린적인 생산구조의 지방화 과정은 공상적고 독단적인 면모가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생겨난 부작용에 대한 반발로 브레즈네프의 스탈린주의로의 복고적인 개혁과정이 등장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 인민이 중앙집권적인 지방과 기업소에 대한 억압을 싫어하였기에 브레즈네프의 정치체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고 상향적인 불만이 생겼다는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로는 흐루시쵸프의 지방화는 고용의 사회불안정과 경제적 격차, 위계 등 공산사회의 이상과 유리되는 경제적 억압관계를 상기시킨다. 러시아 인민은 이러한 경제적 격차나 위계질서, 임금과 고용에서의 사회불안정 또한 우려하였기에 브레즈네프 체제가 등장할 빌미가 제공되었고, 반자본주의적 안정 정책이 지지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료와 인민 사이의 조합주의는 본질적으로 내부 및 외부상황의 변화에 취약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멘클라투라, 즉 정보와 권력에 대한 접근권을 독점하고 있는 이들이 이익을 보고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어지기에 브레즈네프의 개혁이 안정 속에서 관료적 부처주의의 강화에만 기여했기에 역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생활경제나 경공업이 낙후된 소련사회로 퇴화되는 결과물아 나타났다는 것이다.

본 발표에서는 브레즈네프의 권력장악과정과 경제정책을 살펴보고, 소련의 일당중심적 개혁이 개혁의 실패를 좌초했다는 전통적 비판, 그리고 국내적 여론과 국내외적 수요에 의한 개혁요구의 수용이 조합주의적 움직임을 낳았고, 필연적으로 이러한 개혁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비판(Bunce, 1983)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브레즈네프의 인물상

브레즈네프는 지도자로서는 우둔하지만 심리적 감각을 가지고 인간관계의 술책에 능한 사람으로, “지적이지 못하였으나, 소련의 행정적인 관리 기관의 구조와 기능을 잘 알고 있었”던 정치적 인간[2]고 평가된다. 그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로버트 맥닐(Robert H. McNeal)의 경우 그를 “권력투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3] 정치적 인간 이라 평하였다. 우크라이나 출생의 그는 소년 시절 독일군, 적군, 백군의 진격과 퇴각, 절망적 기근과 흑사병 등 재난 경험을 겪었고, 다양한 지역의 당조직 경험하며 신경제 정책, 여러 지역에서의 당 업무를 경험하였다. 또한 그는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를 거쳐서 살아남은 인물이며 흐루시초프의 반당그룹 투쟁에서 중용되어 높은 수준의 정치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당시 군대에서 광범위한 업무 경험과 같은 군대 경험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결단력과 민첩성을 갖고 야망과 발빠른 배은망덕함을 갖고 정치적 행운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볼코고노프의 경우, 그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소개하며 그를 “지도자로서는 소박, 공명심에 심취한 순진하고 귀 얇으며 나약한 인물” [4]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지 않았으며, 멧돼지 사냥에 심취하고, 말기에는 자신 스스로에게 훈장과 문학상 등을 수여하였는데, 이에는 자신의 현명함이 국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순진하게도 이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말년에는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했으며 죽을 때까지 주변에 아부하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이영형은 “정치인의 ‘허위적 술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야당’이 존재하지 않는 정치적 공간에서는 ‘허위적 술수’가 보다 빠르게 현실화된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점들은, 브레즈네프가 그의 집권 기간동안 1인 지배체제를 공고화하는데는 능하였지만, 그 이후에 소련의 경제를 깊은 침체로 몰고가는 이유 짐작할 수 있게끔 한다.


  1. 흐루시쵸프 축출과 브레즈네프의 권력 장악과정


A. 흐루시쵸프 축출

브레즈네프의 전임자인 흐루시쵸프 개혁은 지역경제협의회인 소브나르호즈(sovnarkhoz) 개혁을 통해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스탈린 시기의 중앙집중화로 인한 각 중앙부처들의 이기주의적 경쟁으로 인한 부처주의 폐단을 철폐하고자 하였다. 이에는 소기의 성과도 있었지만, 흐루시쵸프 본인의 주관적, 즉흥적, 공상적, 유토피아적인 낙관과 허풍이 개입한 경솔한 계획안이었고 개혁이 실패하는 원인이 된다.

그 결과 소브나르호즈는 지방에 대한 분산화가 추구한 근본적인 목적과는 달리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로, 지방 관료들 사이의 지역주의를 낳아 각각 100여개 지역의 경제 관할권역이 각각 지역 내에서 자급자족하는 분절된 경제체제를 낳는 폐단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로, 정보체제의 개방(information system)이나 개인역량의 발휘를 고양하는 동기체제(incentive system)는 아무런 개선책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공식경제체제와 함께 사실경제체제(De facto system)에도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경우에만 경제성과의 제고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체제 내 혼란이 가중되어 국민소득 성장률과 노동생산성은 떨어졌고, 1인당 실질소득 성장률은 크게 동요하였다. 결과적으로 실질 생활수준의 쇠퇴를 불러왔다고도 볼 수 있다. 중앙 관료들의 불만 고조 또한 개혁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다. 스탈린 시절에 구조적으로 사회 모든 영역에 침투한 관료적인 지배구조의 반작용과 압력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따라 흐루시쵸프 정권은 지역경제협의회 수를 반대로 47개로 줄이고, 과거의 기구인 국민경제최고회의(Vesenka)가 연방수준에서의 경제활동 조정 위해 부활되었다. 이는 스스로 이제까지의 개혁안이 경솔한 계획이었음을 시인하는 꼴이 되었다. 따라서 이는 흐루시쵸프의 개혁안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1964년 10월의 흐루시쵸프 축출을 도모하는 것에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흐루시쵸프는 ‘미국을 추월하는 경제성장’과 ‘공산주의의 물질적 토대 완성’를 말하였지만, 실제의 개혁적 성과는 기대와 실망을 불러왔고, 개혁은 무모하여 실패할 시의 후폭풍을 우려하게 만들었고, 공산주의 체제 내에서 경계되어 온 ‘노동 착취’와 ‘비민주성’에 대한 정치인의 긍정적 평가를 위한 허위적 평가로 들렸을 것이다.

흐루시쵸프의 축출은 스탈린으로부터 흐루시쵸프가 권력을 이어받았던 것에 비하여 조용하고 안정적인 정치변동이었다. 흐루시쵸프가 흑해 휴양을 갔을 동안 브레즈네프, 코시긴, 포드고르니, 수슬로프 등 당내 노멘클라투라 세력은 ‘‘서기장이 몸이 좋지 않아 사임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며 흐루시쵸프를 축출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반대된 것으로, 흐루시쵸프는 사임 의사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후 바로 크렘린으로 돌아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대중들 앞에서의 공개적 비난’과 ‘자발적 사직’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선택 가능한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자발적 사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인 것이다.

이는 흐루시쵸프가 했던 것처럼 스탈린 격하운동과 숙청인사 복권운동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과거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은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반당 그룹 운동 등 체제 내부 투쟁을 수면 위로 불러일으켰다. 이와 대조되게 새로운 정권은 흐루시쵸프를 공식적으로 격하하거나 축출한 것이 아니라 적당한 핑계를 두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정권교체가 반복된다면, 대중에게 분열된 모습만을 보임으로서 당과 정권의 신뢰도에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즉, 공개적인 권력투쟁이 체제 내부 안전에 손상을 입힐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며, 이는 현실적인 안정과 통합의 강조로서 다분히 레닌주의적인 전통의 면모를 계승한다.

새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통적인 계보를 강조하는 것이 스탈린주의에 달려있지만, 흐루시쵸프가 말하는 스탈린주의의 과오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흐루시쵸프를 축출한 세력은 이러한 체제 안정과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각을 위해 단지 10월 혁명 50주년 행사, 레닌 탄신 100주년제에서의 레닌 숭배를 강조했을 뿐, 흐루시쵸프가 시작한 스탈린 격하운동 및 숙청인사 복권운동을 1964년에 바로 중단하지 않았고, 이는 이후에도 수 년간 계속되다 점진적이고 조용하게 소멸하게 되었다. 스탈린 격하운동과 숙청인사의 복권운동은 1964년 쿠데타 이후에도 계속되다 적당히 마무리되었다. 흐루시쵸프 격하 이후 1966년 3월의 첫 당대회에서는 스탈린의 복권이 임박한 것처럼 느꼈던 소비에트 민간 지식인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스탈린 문제는 분명히 안건으로 등장하지 못하였다. 다만, 1970년 즈음 되어 스탈린의 무덤에 흉상이 세워지는 등 복고적 경향은 분명하였다. 즉, ‘스탈린이 범한 과오는 실제로 일부 악의에 찬 인사들이 범한 과오만큼 나쁘지 않고 그가 국가에 헌신했으며 전시에 보여준 지도력은 탁월하였다’[5]는 것이 새 지도자들의 절충적인 입장이었다.


B.브레즈네프의 권력 장악과정

흐루시쵸프 이후 소련의 정치체제는 브레즈네프(제 1 서기장), 코시긴(수상), 수슬로프(간부회의 이념 담당 위원), 포드고로니(당서기)의 집단지도체제의 형태로 성립된다. 보다 지적인 다른 지도자들에게 큰 위협세력으로 생각되지 않았기에 브레즈네프가 새 지도체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초기에 “브레즈네프의 권력은 제한되어 있엇으며 코시긴의 역할은 강했다.”[6]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1965년 초부터 포드고로니의 측근을 제거하고 있었으며 당년 말에 포드고로니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최고회의간부회의 의장)로서 권력에서 조용히 밀려난다. 이는 포드고르니가 보다 친 흐루시쵸프적인 인물이었고, 흐루시쵸프 축출 과정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참가하였기 때문이다. 포드고로니의 담당 역할이었던 당서기국 통제 업무는 이후 브레즈네프와 그의 협력자인 키릴렌코의 수중에 들어가, 키릴렌코는 1966년에 서기국에 추가로 임명된다.

흐루시쵸프의 후계자들에 의해 미코얀(1965)이나 셸리핀(1967) 같은 인물들 또한 각각 정치국과 서기국에서 축출당하는데 브레즈네프는 이렇게 남겨진 당서기직에 우스티노프, 쿨라코프, 카피토노프(1965), 키릴렌코, 솔로멘체프(1966), 카투셰프(1967), 돌지크(1972) 같은 자신이 후견하는 세력을 임명하며 자신의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들 모두를 직접적으로 브레즈네프가 임명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사후승인은 받았기 때문에 “정도 차는 있어도 브레즈네프가 이들의 후견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7]이다. 당서기국은 당과 국가의 여러 조직 중 가장 순수하게 정치색을 띄고 있는 핵심 기구이기 때문에 당서기국의 장악은 스탈린과 흐루시쵸프의 사례에서처럼 권력을 장악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곧 정치국 구성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며, 1973년의 셸레스트나 보로노프의 경우처럼 브레즈네프를 반대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만 하여도 고위직 인사들은 쉽게 제거되었다. 결론적으로, 1974년 브레즈네프가 장악한 당서기국은 1969년의 그것보다 훨씬 견고하게 정치국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브레즈네프의 권력 장악 과정은 1960년대의 코시긴과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존중하는 쌍두체제로 운용되었던 새로운 집단지도체제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는 브레즈네프의 1인 독주체제로 전환되는데에 큰 기여를 한다. 1971년 제24차 당대회에서는 특히 코시긴이 주도하던 경제정책에 대한 통제력이 완전히 잠식된다.

하지만, 이는 흐루시쵸프의 세력기반 형성과정과는 다르게 매우 조용하고 안정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코시긴이 권력에서 축출되었다기 보다는, 코시긴의 세력을 제외한 다른 권력의 영역을 브레즈네프 세력이 장악하면서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과 같다. 이러한 방식은 중앙위원회에 대한 브레즈네프의 장악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961년 흐루시쵸프 시절에 선출된 중앙위원회 정식위원의 약 80%가 1966년에 재선되었으며 1966년 그룹의 78%가 1971년의 제 24차 당대회에서 계속 활동하였다.[8] 이 또한 기존의 핵심 그룹을 위협했다기 보다는, 중앙위원회 위원의 수를 1961년의 175명에서 195명으로(1966), 1971년에 241명으로 늘려가며[9] 자신의 추종자들을 확대하며 권력의 핵심 그룹을 양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에 따라 1976년 제25차 당대회에서는 스탈린 못지않은 개인숭배적 찬사를 받았고, 1977년에는 국가원수, 군최고사령관, 소련국방위원회 의장의 지위,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직을 확보하였다. 이쯤 되어 브레즈네프의 활동을 막을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며, 정치국과 서기국은 충성스럽게 브레즈네프의 생각을 추인하는 역할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1. 브레즈네프의 정치적 이상


A. 발전적 사회주의론

새로운 집단지도체제는 흐루시쵸프의 ‘공산주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공상적 개념’에서 ‘발전된 사회주의’ 선언으로 돌아간다. 이는 흐루시쵸프가 성급하게 선언한 공산주의 사회로의 토대 형성에 대해 소련 사회 내에 명백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흐루시쵸프의 자유화 움직임 속에서 소련 내 임금의 격차와 직업환경이 조금 더 불안정하게 변하는 부분에 대해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구조적으로 사회 모든 영역에 침투한 관료적인 지배구조, 헤게모니에의 익숙함으로 인한 변화에 대한 성급한 개혁이 낳은 반작용이기도 하다.

브레즈네프는 1967년이 되어 발전된 사회주의 사회를 언급하였고, 소련 헌법은 1977년 25차 당대회에서 발전된 사회주의의 형성을 천명하였다. 이상적인 ‘발전된 사회주의’ 사회란 다음과 같다. 브레즈네프는 “성숙한 그리고 발전된 사회주의 단계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발전하는 비교적 장기간의 시기”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경제발전 수준의 괄목한 증대와 당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적인 단결 속에서의 사회 안정을 의미한다. 이는 전 인민이 생산과 분배, 사회 및 문화정책, 재판 과정 등 통치활동에 적극적이고 일치된 자세로 참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오직 당만이 각종 정치적-조직적 활동의 경험을 통해 공산주의 건설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 당은 노동계급과 노동인민 및 전체인민의 정치적 지도자이다. 당은 개혁 노선을 형성하고 합성하는 창조자이며 복잡해지는 사회-경제적 질서의 ‘조정자’로서의 역할 또한 수행한다. 즉 당은 모든 국가기관과 사회조직체에 침투하여 변화를 이끌고 관료주의 확산을 방지한다. 국가는 생산수준, 경제규모의 발달과 사회구조의 복잡화 속에서 경제적-사회적 발전 계획과 엄격한 질서 및 규율 유지를 위해 적극적이고 정교한 역할을 수행하고 그 기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즉, 이는 사회적 통합과 안정이라는 이름하에 노동계급의 정당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정당, 공산주의의 건설을 위한 전인민의 국가 형성의 강조로 나타난다. 즉, 발전된 사회주의의 이론적인 이상은 공산주의의 물질적-기술적인 토대 아래 계급적 적대감이 사라지고 민족의 법률적, 현실적 평등과 그들의 형제적 협동이 이루어지며 단결시기는 조건으로 나아가는 조합주의적인 사회이다.


B. 재스탈린화 정책 (restalinization) : 노멘클라투라 관료형 지배체제의 강화

하지만 1961년 흐루시쵸프 또한 노동계급의 당이 아닌 전 인민의 당을 강조하였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독재는 ‘전채 인민에 의한 국가’에 의해 대치되었다”[10]고 선언했었다. 이렇게 사회주의의 달성에 관련된 선언들은 스탈린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흐루시쵸프의 그것은 조금 달랐다. 흐루시쵸프는 치안과 질서 유지 등 경찰업무를 보조하는 ‘공공질서를 지키기 위한 인민조직’, ‘공산청년조직(Komsomol)에 의한 탐색운동’ 등, 국가기능을 직접 인민에게 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브레즈네프의 집권기에 들어서, 이러한 ‘인민대’(People’s Team) 체제는 폐지되거나 정체되었다.

브레즈네프의 발전된 사회주의론은 사실상 국가가 중앙의 당에 종속되고, 대중 인민들 또한 안정이라는 이름하에 당에 대하여 종속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당의 엘리트가 국가권력에 침투하는것은 한편으로 당-국가의 완전한 유착현상을 낳는다. 이렇게 생성되는 것이 공산주의 사회의 ‘새로운 계급’이라 할 수 있는 노멘클라투라이다.

보슬렌스키[11]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자본가는 공업의 지휘자이므로 자본가가 아니다. 자본가이기 때문에 공업의 사령관인 것이다.’ 라고 했다. 레닌주의에서는 자본주의 자본가의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에 상응하는 법 기반을 노멘클라투라가 대신하게 된다. 자본주의에서는 소유 그 자체가 특권이 되지만 소련의경우 ‘결핍의 경제’적 질서로부터 ‘국가소유의 점유와 향유’가 특권으로 비롯되는 것이다. 적대적인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이들은 탈계급자의 계급으로 일반적인 계급적 구조를 넘어서 있기에 사실상 노멘클라투라는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다. 이들은 노동을 강제하고, 노동조건과 임금을 강제하고, 직장을 이탈, 노동을 포기하는 것을 강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행정기구와 그것을 견제하는 기구인 당이 유착하는 노멘클라투라의 현상에 따라 행정기관이 경제를 장악하게 되면서 당은 인사를 담당하는 행정부서로 전락하게 된다. 점차적으로 당의 통제를 받아야 될 대상들인 노멘클라투라 관료집단은 통제기구들의 인사권을 당 내부에서 장악함으로서 권력은 내부에서만 순환되고 사실상 당의 권력 견제로부터 해방하게 되는 것이다. 당은 이들에 대한 견제세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노멘클라투라가 당과 국가를 독점하여, ‘안정’이란 이름 하에서 자신의 특권의 왕국에 골몰하게 된다. 이렇게 당을 무장해제시킨 노멘클라투라는 외부 자극에서 벗어나 룸펜화되며, 노멘클라투라는 전체 체제가 지향할 정치노선마저 실질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서 사회보장과 노동 문제 등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은 권위를 가진 현직 관료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자유로운 토론은 형성되지 못하였다. 즉, ‘민주’보다 ‘집중’에 방점이 찍힌, 아래로부터의 수요보다 위에서의 공급이 절대적인 신민형 정치문화가 극대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고 지도층에 대한 숭배, 당과 국가의 중앙 집권화, 완전한 계획 경제 등에서 엘리트 그룹 내의 ‘주고 받는 정치 분위기’가 형성되며 관료들이 과도한 자기확신과 독선 및 부패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표 1>의 예시와 같이, 브레즈네프 시기의 엘리트들은 안정 속에서 교체되지 않고 노령화되고 현실에의 안주를 추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개혁의 돌파구는 계속 저지되고 정체된다.

표 1 : 브레즈네프 정권기의 평균 연령[12]

연령대 1952 1964 1982
정치국원 55.4 61.0 69.4
정치국원 후보 50.9 52.8 66.8
서기국원 52.0 54.1 67.6


C. 반체제 운동

흐루시쵸프의 탈스탈린주의는 볼셰비키 정통성에 대해 의심을 품는 예술가와 지식인의 반체제 세력이 성장할 수 있게끔 만들었고, 브레즈네프 집권기와 더불어 반체제 인사들의 우려가 커졌음은 분명하다. 1966년 당대회를 앞두고 “많은 지도적인 소비에트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이 당대회가 스탈린을 복권시키는 방향으로 중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 믿었으며, 25명의 서명이 담긴 편지가 스탈린 복권을 단념시키기 위해 당대회에 전달되기도 했다.”[13]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역사가 네크리치(A.M.Nekrich)가 1941년 6월의 군부대격변에 관한 책을 소비에트 연방에서 출판하는 데 성공하였고, 솔제니친(Solzhenitsyn)이 강제 수용소 Gulag 제도에 관한 책을 1974년 해외에서 발간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볼 때 반체제 운동은 흐루시쵸프의 시절을 ‘천천히’ 수정하는 과정에서 어느정도 표면화되는 경향 또한 존재하였다. 확실히 시민권 수호 실천 그룹(the Action Group for the Defense of Civil Rights[14], 1969)과 같은 시민단체는 지하에서 수면 위로, 공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의 반체제 운동 탄압은 상당히 빈틈없는 면모를 보였다. 1967년 유리 안드로포프는 비밀경찰 총책인 국가 안보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시에 정치국 후보위원에 임명되었는데 1973년에는 정식 정치국원으로 승진하였다. 당기구와 경찰활동은 이렇게 주의깊게 연결되었는데, 이는 경찰통제가 당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위험을 방지하고 반체제 인사 탄압을 당통제하에 두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통제가 당으로 확대되면 당내 브레즈네프에게 후견을 받는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생긴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맥닐에 따르면, KGB가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는 데 사용한 수법은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형사소추, 소위 정신병 치료를 위한 강제수용, 그리고 (자의 또는 타의가 섞인) 해외 이민”[15]이었다. 첫번째 정책은 사형과 같은 극형은 선고되지 않았지만 대개 강제 노동형과 같은 중형이 선고되었다. 처음에는 신통치 않았고, 대중단체들 사이에서 비판세력에 대한 공감을 불러올 수 있는 역효과를 갖고오기도 했다. 하지만, 굴라그에서의 맹추위와 가혹한 노동은 독자출판된 지하 정기간행물(samizdat)인 시사 연대기(Chronicle of Current Events[16])에 실려 대중에게 직접 공포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지하간행물 독자들을 압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로 최초의 것은 1966 작가 안드레이 시니얀스키와 유리 다니엘에 대한 조잡하지만 널리 공개된 재판이었다. 또, 소련의 유명 핵물리학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소련의 민주화 및 인권확립 등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반소 활동으로 낙인 찍혀 탄압을 받았고 1980년대에는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고리키 시(지금의 니즈니노보고로드)로 유배되었다.

두 번째로 정신병자로 몰아붙이는 방법의 경우, 경찰테러로 인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으면서 많은 반체제 인사들을 약에 취해 무관심한 상태로 유지시킬 수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의 군부독재 시기의 “빨갱이” 담론과 같이, 지식수준이 낮은 대중에게는 공산주의 전복자나 반골적 기질은 정신병에 가깝다는 인식을 대중화한 것 같다. 이러한 전술은 저명한 생물학자인 조레스 메드베데프의 경우처럼,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거나 신망을 얻고 있을 경우에는 적용하기에 어려웠다.

세 번째 방법의 경우, 심각한 두뇌 유출을 초래할 수 있었으며 소련 출신들의 해외 반볼셰비키 커뮤니티의 형성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장기적인 결과는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가능성은 러시아 혁명사에서의 레닌의 해외망명 활동에서 짐작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령 솔제니친과 같이 스탈린 시기를 살아남으며 스탈린 격하운동과 같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저명한 반체제 인사들은 위의 두 방법으로 처벌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들을 해외에 망명할 시 소련 대중들과의 교신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은 확실하였다. ‘소련에서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거나 죽던지’와 ‘해외로 추방당하던지’ 사이에서의 선택권은 많지 않았으며, 서방 세계에도 추방당하는 것은 확실히 인간적으로 보였다. 1973년에 정부에 맞서서 레닌주의에 의존하지 않고 정통 그리스도교 배경에 의존하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정부를 주장하는 편지를 보낸 솔제니친은 1974년 초에 서독으로 추방되고 부자로서 비난되었다. 이렇게 솔제니친을 필두로 한반체제 운동이 가장 격해진 시기에 이민전략은 절정을 맞았다.


  1. 브레즈네프의 경제정책의 변화와 침체


표 2 브레즈네프 시기의 경제실적[17]

경제부문/기간 1955-1965 1966-1970 1971-1975 1976-1980 1981-1983 1984-1987
국민총생산 5.4 5.2 3.7 2.7 2.3 1.6
공업 7.5 6.3 5.9 3.4 1.5 2.1
농업 3.5 3.5 -2.3 0.3 4.2 0.8
서비스 4.0 4.2 3.4 2.8 2.1
소비 4.7 5.3 3.6 2.6 1.7 2.4
투자 9.1 6.0 5.4 4.3 4.2 3.0


표 3 계획과 실제 달성 정도[18]

구분/기간 1966-1970 1971-1975 1976-1980 1981-1985
국민총생산 계획 6.5-7.0 5.8 5.0 4.0
실제 5.0 3.1 2.2 1.8
공업 계획 8.2 8.0 6.5 4.9.
실제 6.3 5.4 2.6 1.8
농업 계획 5.5 3.7 5.0 5.0
실제 3.7 -0.6 0.8 2.1

A. 브레즈네프 집권 초기의 코시긴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

1971년 당대회 이전으로 정의할 수 있는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초기는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을 중심으로 한 과도기적인 집단지도체제로, (특히 공업 부문에 관련된) 소련 경제를 코시긴이 관장하고 있었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1964년 코시긴 수상은 사회주의 상태하에서의 인민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주요한 원천이 ‘노동에 따르는 보수’에 있음을 언급하였다.[19] 브레즈네프 또한 생산 발전에 경제적 자극이 필요함을 언급한다. 이는, 1962년에 소련의 경제학자 리베르만이 <계획, 이윤, 및 상여금>이라는 논문을 당기관지 <프라우다>에 발표하여 제안한 것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리베르만 주의의 골자는 시장에 대한 의존과 경제정책 결정의 분권화라고 할 수 있다. 인민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주요한 원천이 노동에 따른 보수라 파악하여 지방분권화와 이윤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 1) 중앙의 지시적 계획은 산출량 목표 설정에만 한정시키고 나머지 투입요소는 개별 기업이 결정하도록 한다. 2) 기업의 물적 관심을 자극하기 위해, 수익성이 가장 중요한 성과 지표가 되도록 하면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한다. 설정된 산출량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도록 한다. 또한 누진적 구조의 상여금으로 목표의 초과 달성을 유도한다. 3)계획 기간을 연장하여 기술혁신을 도모하고 단기적 생산조건에 따르는 목표 조정은 하지 않는다. (장기적 계획) 4) 지역경제위원회가 기업의 실적을 기초로 과제를 할당하는 방식을 중지한다. 5) 가격개혁을 시도하여, 탄력성 있는 가격형성 원칙을 설정한다. – 로 요약할 수 있다.

코시긴 수상은 이러한 리베르만 방식에 입각하여 기존의 중앙집권적 소련경제에 어느정도의 신축성 있고 유용한 경제수단 활용의 가능성을 도모하는 개혁을 도모하였다. 개혁의 골자는 1) 부처체제를 재정비하는 행정개혁, 2) 기업동기체제의 완전한 재정비, 가격개혁 등으로 개인의 물질적 보상을 더욱 강조하는 것(기업가 정신의 장려), 그리고 3) 관료에게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환경을 보장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브레즈네프는 (특히 농업 분야에서의) 기존 개혁의 실패가 재정적 인센티브보다는 정책선택의 문제에서 실패했다고 보는 입장이었지만 이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고 1966년의 2차 당대회에서 가벼운 개혁방향에 대한 부정적 언급 정도에 그쳤다.

코시긴 개혁안의 구체적 실행은 다음과 같다. 1) 권력이 지방주의의 폐단을 노출한 지방계획기관으로부터 새롭게 설립된 23개 산업 관련 부처로 재중앙화(recentralization)된 것과 기존의 국가계획위원회(Gosplan)가 더 큰 권한을 갖게 되었다. 2) 기업이 책임지고 있는 의무사항을 과거의 35-40개에서 8개로 대폭 축소하고 보너스 체계를 변화시켰다. 가령, 생산시설의 개선을 위한 생산발전 기금, 복리후생 및 종업원의 주택건설을 위한 사회복지 및 주택 기금, 노동자 상여금을 지불하기 위한 물질적 인센티브 기금 등 기금의 형성이 의무사항의 예에 속한다. 보너스의 경우는 노동에 따르는 분배의 차별을 인정하여 기업 종사원들에게 생산에 대한 인센티브 자극을 제공하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3) 가격결정 메커니즘을 새롭게 중앙화하여, 이전에는 각료회의 및 국가계획위원회에 의해 가격결정이 방만했지만 국가가격위원회는 가격결정을 더욱 일률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하지만, 분권화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중앙에 있었다. 중앙집권적 계획과 정치적 통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관료들은 시장가격과 무관한 정책 목표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2)에서와 같이 기업에 대한 분권화조차 경우 중앙의 간섭이 줄어들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교묘해진 의무사항과 보너스 체계의 연계를 통해 각 부처들이 중앙에서 기업들의 생산활동을 간섭하려 했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효율성이 눈에 띄었지만 범위가 확대되며 효율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가격결정원칙의 일부가 변화되었어도 고정가격 유지 및 원가와 기업의 이윤을 보장하여 가격이 공급 중심으로 설정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B. 브레즈네프 권력집중기의 경제정책과 침체

이에 따라, 1969년 12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브레즈네프는 코시긴의 경제개혁과 가격개혁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앞서서 보았듯이, 서기국의 장악 과정으로부터 권력의 추는 브레즈네프에게 기울고 있었으며, 66년의 브레즈네프 발언부터 코시긴과 브레즈네프 사이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관료가 국가관료에 대하여 우위의 영향력을 확립하며 행정력을 장악하는 독주체제의 형성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단계로 볼 수 있다. 즉, 브레즈네프는 1971년이 되어 소련 경제정책 또한 장악하게 된다.

브레즈네프는 농업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경제적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코시긴 등은 시장의 활성화로 도모하였지만, 브레즈네프는 반대로 71년 당대회에서 임금을 평등화 하고 강하게 과학기술의 발전, 서구 테크놀러지의 도입을 통한 생산성, 효율성 향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물질적-기술적 토대의 강화는 공산주의로의 단선적인 발전상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1967년 브레즈네프는 “국가의 이익은 기업 및 일반 근로자의 이익과 결부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이전 개혁안의 내용에서 기업의 이익에 대한 내용을 삭제하였다. 또한, 행정적 재중앙화를 통해 부처 및 국가위원회의 수를 과도하게 확대하였으며 가격개혁 역시 경제행정을 중앙에 집중되었다

1973년 브레즈네프는 산업을 재편성하여 생산연합체를 구상한다. 기업들을 생산연합(production association)으로 합병하여, 경제운용합리화 즉, 정책결정 위계를 새로 만들려고 시도하였다. 생산연합이 체제에서의 기본적인 정책결정단위가 되는데, 이는 1) 행정규모 감축 및 중앙에 의해 경영되는 산업분야 기업의 효율 증대가 목적이다. 2)경제적 절약 효과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하며 중앙에서 기업의 내부사정을 파악하기 쉽도록 한다. 이에 따라 많은 기업들을 하나의 정책결정 권력기관 아래에 두고 합병을 통해 생산업무와 투입할당을 비효율적인 기업에서 가장 효율적인 기업으로 이동시키게 된다.(중앙집중, 조직통폐합) 3)또한, 과학-기술과 생산의 결합을 시도하여 생산의 전문화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는 연구개발과 생산과정의 연계를 통한 기술혁신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산연합체, 산업연합체 조직은 그 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구조의 관료적 배타주의, 개혁에 대한 묵시적 반항 및 지연, 연합체 조직에 포함되는 대상 기업체들의 실제적인 지역적 분산성들은 새로운 거대한 체제에서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행태를 반복하였고, 기업체 사이의 기능 중복 현상 또한 존재하였다. 70년대 후반 들어 곡물의 부족은 만성적인 경제적 위기차원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관료적 분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군사부문은 항상 우선시 되었다. 65년부터 79년까지 화학화가 멈추어지지 않았어도 중공업은 여전히 우선순위가 주어졌고 3년간의 흉작으로 1981년에는 전체 소비량의 20%인 4천 6백여만 톤의 밀을 수입해야 했다. 이러한 곡물 부족분은 서방에서 사들여왔기에 서방 외환적자는 점차적으로 40억 달러에 육박했다. 공급 위주의 정책은 사회의 요구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고, 결과적으로 소련 정책은 긴축 정책으로 사실상 중단되고 있게 되었다.

  1. 결론 –개혁의 실패에 대한 조합주의적 분석과 의의[20]

브레즈네프의 소련에 대한 서방의 기존 연구중점은 엘리트의 정치(High politics)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주장의 골자는, 엘리트의 결정이 미친 국내/국제영향들이 국내 개혁의 성공/실패에 중요하고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고 국제질서(동유럽 위기, 패권경쟁, 데탕트 등)에 대한 엘리트의 반응이 국내, 대외정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요구에 대한 상부구조인 보수정권의 충돌이다. 소련 엘리트의 결함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거스르는 선택을 추진하여서 더 악화된 상황에 직면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번스(Bunce)에 따르면, 브레즈네프의 개혁은 서방의 기존 연구중점인 엘리트, 노멘클라투라의 정치(high politics)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고, 엘리트에게 끼친 국내/국외 환경의 영향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데탕트에 따른 서방과의 경제접촉, 대내적으로는 60년대 말의 농업부분의 계속적인 개혁 필요성과 소비자들의 생활용품, 경공업제품에 대한 요구, 소작인들의 경제적 안정에 대한 욕구 등 핵심 경제적 이익(interest)이 다원화되어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흐루시쵸프 시절의 화학공학 육성 정책의 지속이 한가지 예로, 정권 말기가 시작되는 70년대 중반에야 다시 군수산업과 중공업이 부각되었다.

브레즈네프 개혁은 소련 시스템의 정치적, 경제적 영역의 혼합을 통한 조합주의적인 시도로, 확실히 대중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었다. 흐루시쵸프가 말한 ‘인민의 당’과는 달리, 브레즈네프의 ‘인민의 당’, 즉 전인민의 지지를 일구어 내는 것은 흐루시쵸프 시절 사회적인 균열, 갈등이 생기고 좀 더 복잡한 경제와 더 많은 사회적 요구가 생겼기에 신민형의 복종적인 공급 중심의 정치문화에서 인민이 이에 대해 불안감이 생겼다는 점을 반영한다. 이러한 혼란, 갈등의 피로를 줄이고 복지국가의 확장을 통해 지배적 정치경제적 이익들을 정책과정으로 합일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하는 것을 도모한 것이다. 다시말해, 국가는 경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그룹에 이익을 공급하고 그에 대한 교환관계로서 순종, 온건한 요구, 권력, 지위, 경제적 자원에 대한 지배적인 분배를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정치 안정과 경제성장을 서로 강화하는 것, 다른말로 조합주의자적 거래의 계속에 의한 브레즈네프 통치의 연속을 도모하는 것이다.

조합주의가 몰락하는 것은, 1970년대 중반 정책에 대한 반응과 이익의 변화에 따라 불일치가 발생하고 증가하며 조합주의 모델에 균열이 일어나고 이에 대해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조합주의 정책의 초창기에는 정책에 대한 반응(대중의 필요)에 대한 이익이 일치하였으나 점점 대중의 필요가 다른 것으로 변화하고, 2) 노멘클라투라 집단이 정책적인 이유보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협상할 조건이 나타난 것이다. 비대칭적 자원에 대한 접근에서 노멘클라투라가 그들 자신의 역할 뒤에 있는 권위와 필수성 때문에 항상 돈과 영향력에 대해 더 효과적으로, 유리하게 협상하게 된다.[21] 따라서 조합주의적 결정과정의 설립과 정책우선순위가 필연적으로 조합주의 시스템, 관료주의를 지키는 쪽으로 향상시키다 보니 정책 실패가 주객전도적으로 가중되었다.

또한 조합주의는 경기불황에 너무 취약하다. 정부에 대한 지지는 정책수행 정도에 따르지만 불만족은 경제적 수요에 기반하는데, 이러한 불만족, 경제적 수요가 중앙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관료를 견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아서 중화학 산업으로 정부투자가 이동하며 생활용품 공급이 줄어드는 것과 자원통제가 점점 되지 않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래에서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농산물 등의 수요를 외국에서 사들였고, 이러한 국부 유출은 장기적으로는 기업감독가, 계획가들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노동계급과 소작인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결과물을 낳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을 해외로 전달하는 부처의 능력이 강화하기에 급급하였고 역설적으로 이것이 관료의 성과에 대한 착각과 관료제 그 자체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다. 관료 없이는 당장의 상황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순환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브레즈네프 계획이 천명하는 ‘장기적 미래목표’는 영원히 추구할 수 있는 목표로 변명된다. 이것은 당장의 생산능력을 향상하는 대책보다는 과학기술에 대한 과도한 고취와 단기적인 자연자원의 착취에만 골몰하는 결과물로 나타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조합주의적 이론에 의하면, 브레즈네프 개혁의 등장은 당시 소련 인민의 필요가 반영되어 나타난 결과물이고, 단순히 당의 일방적이고 전일적인 과두제에 의한 지배(Rigby) 결과물이 아니다. 노멘클라투라의 헤게모니는 어느정도 국내적 반응에 따라 등장하고 소멸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러시아정치사, 이영형, 2000, 엠애드
볼셰비키 전통 로버트 H. 맥닐, 1983, 사계절
노멘클라투라 : 소비에트의 붉은 귀족, 미하일 보슬렌스키, 1988, 문명당
크렘린의 수령들, 볼코고노프, 1996, 한송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Brezhnev Era: The Rise and Fall of Corporatism, Valerie Bunce, British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1983
소연방의 경제개혁과 체제변동-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 개혁의 비교, 이홍섭, 2000, 국제정치논총,
러시아 개혁정책의 뿌리와 과제, 김명호, 1992
러시아의 체제전환과 ‘노멘끌라뚜라’, 김창진, 1997, 한국정치학회


[1] 김명호, 러시아 개혁정책의 뿌리와 과제, 1992

[2] 이영형, 러시아정치론, 230page, 엠애드, 2000

[3] Robert H. McNeal, 볼셰비키 전통 (2판), 238page, 이병규 옮김, 사계절. 1983

[4] ВОЛКОГОНОВ, Амцгрцй, 크렘린의 수령들, 1996, 한송

[5] McNeal, 242.

[6] 이영형, 230page

[7] McNeal, 258page

[8] McNeal, 260page

[9] Ibid.

[10] McNeal, 219page

[11] Michael S. Voslensky, 노멘클라투라 : 소비에트의 붉은 귀족, 1988, 차근호, 오기완 옮김, 문명당

[12] 이영형, 러시아정치론(엠애드: 2000) p.242에서 재인용한 표를 재인용. (이영형은 윤해수, 러시아체제 변동론(한울: 1995). P.305의 각주-23에서 재인용)

[13] McNeal, 242page

[14] 러시아어로는 ‘Инициативная группа по защите прав человека в СССР’

[15] McNeal, 262page

[16] 러시아어로는 ‘Хро́ника теку́щих собы́тий’

[17] 이영형, 258page에서 재인용 (이영형은 폴 그레고리, 로버트 스튜어트 p. 208에서 재인용)

[18] Ibid.

[19] 이영형, 250page에서 재인용.

[20] Valerie Bunce의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Brezhnev Era: The Rise and Fall of Corporatism 참고함

[21] 공급자 권력만 강화했고, 수요측면의 중요성은 더욱 무시되었다. 또한, 각 부처가 자신들의 권력을 절감시키는 개혁안을 고안하고 수행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관료의 독단적 영역을 막기위해 강력한 초부처적(extra-ministerial) 기구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관료제의 속성을 간과한 처사이다.

Dilemma between Politicization and Science on the Comfort women issue

Dilemma between Politicization and Science on the Comfort women issue

Jaehyun Yoon

June 2016


Park Yuha’s controversial book “the Comfort Women of Imperial” is arguing that how individuals were functioning under the structure of the patriarchal and militaristic exploitation against the comfort women and soldiers. There were desires for habitus (cultural capital in the social hierarchy), capitalism and some sort of cooperation under extreme threat on each individual’s life. But some of the critics argues her structural argument makes the responsibility of war crime depend on the structure of overall Japanese society and its participators, thus it makes hard to punish the legal responsibility. But according to Park Yuha, there is distortion and generalization on the comfort women, so the Comfort women’s average age, diversity, the direct intervention of military and government, difference with Korean and the other ethnic women group is different with the popular ideas. Myeongsook Yoon, the other scholar who researched this issue before, also says it can be dangerous to frame “forcible mobilization” which conceal the pro-Japanese group and judging wrong responsibility. However, there is still the argument that, according to Yoseop Kim[1], Park Yuha’s approach makes a disturb on the approach of female victims of war crime to be a political actor with subjectivity. I want to argue this dilemma between the politicization and the matter of scholastic fact.


Legal responsibility

According to Park Yuha, “Japan did its legal responsibility, by Korea-Japan treaty. But it was only for postwar processing, not about colonial domination.”[2] Also, Japanese Prime Minister Murayama Domiichi said official apology of government on the comfort women issue and the war crime in 1995. But there is still the other argument that it was not a proper apology. He said in Japanese cabinet, “Korea-Japan annexation treaty is made legally valid. But as different matter with Political and moral evaluation, but the government showed serious reflection regret”[3], it means Japanese government does not deny the possibility Korea-Japan annexation was not forcible, but there was also voluntary act from Korea. Murayama also stated in his apology, “Our nation, in the past, has botched state policy and participated in the war and it became a crisis of nation people, colonialization, the invasion which made great torture on Asian states.”[4] And this possibly means ‘Japanese government did not intend bad approach except the Invasion of Manchuria, Sino-Japanese War, and WWII’

Also, there were different perspectives on this apology and other works of Japan. One of example is ‘Tsugunaikan’, Asian Women’s Fund(AWF)’s effort. AWF is made by Murayama government and Murayama worked as head of this institution. He wanted it as atonement, but in Korea, it was not considered as atonement but consolation. I think, the claim ‘legal responsibility is not solved’ and ‘the proper apology is not made’ is able to be understood in this vein.

But Park’s conclusion sounds like still efforts that are sincerely needed are not made by the Japanese government. But she is making it as not the ‘legal responsibility’. Critics who argues ‘the legal responsibility is still’ may say ‘crime against humanity’ which is adjusted on Nuremberg Trials. But I think it is not able and not also proper it is because of that even universal value is judged by human paradigm so there is no proper way to adjust the impeccable human value. Korea-Japan treaty was made by the legitimate government in that time because Park Jung-hee had legitimately become president by following the election. So the comfort women issue is needed to be the issue of apology on imperialism, and it has less been in the proper way.


Structure : whose apology?

The other point of this issue is the structure. Park Yuha is analyzing how and why people acted as soldiers, comfort women, and pimps. For example, although some of the comfort women are forced by local terminal officials like teacher and police, most of them were runaway girls who were not able to be protected in an easy way by the government administration. For example, there were many articles about illegal human traffics in colonial era newspapers, so it was not right in the public area and officially not accepted by the government but tolerated somehow for confronting the matter of the war. Also, there were many pimps who was Korean, and also ex-comfort women ran comfort station in capitalism and lack of social habitus.

But critics say, it is blurring the wrongdoer who should do the apology. According to Hannah Ardent, Eichmann said “I did just what government ordered to me” on his court on the Auschwitz crime in Israel, and he was a person with a good manner in the private area. This made a shock to Israeli people because everybody can be evil if their society structure is wrong. But people  still cannot deny who got interested and who did not from the Nazi government. Likewise, even thought there was a responsibility of pro-Japanese group in the colonial era, there was the main body – the Japanese empire and its government – on this issue. Emphasizing diversity and many perspectives are possible to be feast of speech. Convergence and generalization of the issue are also important as the divergence of study.

The crucial fact is, even though the scholastic fact is made, it does not assure proper apology because science does not have political power by itself. Government always pursues national interest or elite’s (triangle of iron) interest. The interest can be not only capital but identity because strong identity makes the society more stable. It does not mean if there is the factual truth, people tend to be cherry-picker or nitpicker of information, people are derived from the desire to secure their identity.

In this point, the critic argument has some point to listen. But still, I cannot ignore that Park Yuha is making convergence of her argument. For example, she is writing soldiers in frontline actually tried to care the comfort women, and the comfort women and soldiers understood each other in some region. But in the rear, the comfort women used as “public toilet”. She broadened the range of study on soldiers, pimps, locals and other group, and focused moral responsibility especially on policy makers. Understanding structural influence can effort to contemporary individuals to reach his own identity and decisions which are out of nationalism and capitalistic materialism.


Exclusion of the people concerned

Park Yuha is arguing ‘the movement’ is able to exclude ex-comfort women. Also, Sarah Soh is arguing the movement is taking adoption or rejection of information by their will. Park says some of the people who had worst experience are leading the discourse and their view is being considered as common view in Korea, but it was not common. Also, Joseph Yi, a scholar from Hanyang University, says, as the answer he has received from House of sharing, House of sharing and Jeongdaehyeop do not look the Comfort women issue as same with Vietnamese women’s case.

But critics says, ex-comfort women tried to make their voice by themselves and for themselves, and there is subjectivity. For example Nayeong Kim says, “Comfort women Halmonies (*Halmomy means “Grandmother or old woman in Korean) on Japan did not ignore comfort women Halmonies on U.S. in 2012, those two movement faction met each other and encouraged each other”[5] also, Yoseop Kim says “Comfort women of Japan is the first case that publically argued as sex crime in war” and “ ‘Jeongdaehyeop’ and other current organizations are not narrowing and excluding the voices, but it is widening” by standing victims as political actors with the subjectivity.”[6]

It looks like Park Yuha and Sarah soh is arguing overall comfort women, but the critics are focusing the victims of comfort women experience. It looks like major movement organizations had made their original definition in early information which was not enough, and now they are widening their view and definition. For example, Jeongdaehyeop’s ‘Butterfly fund’ is for Vietnamese comfort women in Vietnam war and it looks like they are building international understanding on the sex labour in the war. A comfort woman victim from House of sharing also donated her whole property of 43,000,000 KRW for Vietnamese comfort women issue. I think, they wanted sustainable security on the political movement, so there were some of the mistakes on making convergence of judging the phenomenon. So it is hard to judge current movements are just limiting the discourse, but there is a risk on it if they evade cognition of full information.

Also, this means first, the even critics do not see the comfort women issue in same perspectives and especially activists see the Comfort women issue in the nationalist (or patriot) perspective. Secon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the comfort women victims actually think the issue as ‘nation versus nation’ – which means they have suffered because they were Korean poor women under Japanese colonial ruling.



Korean people got independence, but the core value of the social structure did not change that much. Rather, it is enhanced with the Manchurian model of economic development. Japanese colonial legacy is in everywhere; female mobilization as the sex labour in Korean War, Modernization in the cognition of global hierarchy, military culture, nationalism with fascistic scent, Authoritarian exploitation, racist culture on multicultural family and diaspora and strong judicial body with few people. Sometimes I think ruler is changed but key value of exploitation system is still.

Plus, General Japanese people were also victims of Japanese imperial. They were also exploited as the cheap labour in modernization and mobilized soldier. Of course, what I am saying can sounds not proper because Korean people had pain as second class citizen. It would sound like the school headmaster and the civilian’s voice against survived students as the mobilized soldier in the wartime from E.M. Remarque’s novel, <the Road back>. But no matter what state people belong to, people are same.

But the main actor of international politics is the governments, and the governments are not always on people’s interest. Murayama dommiichi said “solving the problems that they have created by themselves”(結者解之)[7], but it could be a justification of judging the problem the form that they want to solve”. In another way, it may be good to be said that Japanese people want reconciliation for just reconciliation, to bury hatchet which can be between neighbor states potentially. Because it has been time of three gener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actually Young and middle-aged Koreans and Japanese in contemporary century less understand what exactly happened in the past because they did not suffer the grandparents’ century. Burdening grandparents generation’s trauma would be seemed not reasonable. But as unification problem of South Korea which is originated from a lack of choice to improve the state by their hands by the colonialization experience and WWII, the aftermath of historic tragedy is not fully ignorable still. Maybe as unification issue and comfort women issue has been internationally affected the result, there is now no social issues which are fully internal and easy to solve.

Reconciliation cannot be convenient and comfortable by its nature. The conversation includes violence which is unexpected and unacceptable because it starts from the ignorance on each other. Peace may not be able to exist without expecting unknown discord. The political movement and its dynamic energy are inevitably required from bottom to top. Not every general people cannot get an elaborate understanding on each political issues. In this sense, the politics of victimization is natural, and it is about the essence of sustaining political movement even though there is the inevitable problem to overcome – for example, intentional selection of information. The political subjectivity of victims, the general people, is crucial for constructive change. As democracy sometimes makes mistakes, political movement from bottom make mistakes and exclusions of the voice, but I think it would not be about the essence, at least for the organizations on the ethical issue.



Park Yuha, the comfort women of Imperial

Sarah Soh, the Comfort Women

김요섭, 김규항은 박유하의 전부를 말했는가? – 「더러운 여자는 없다」에 대한 반론, 2016-02-03

日총리,”한일합방 법적으로 유효”발언 파문, 1995-10-10, 연합뉴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955790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戦後50周年の終戦記念日にあたって), 1995-08-15, Murayama Domiichi, retrieved from Wikisource


[1]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27

[2] 263page, Park Yuha

[3] 日총리,”한일합방 법적으로 유효”발언 파문, 1995-10-10, 연합뉴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955790

[4]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戦後50周年の終戦記念日にあたって), 1995-08-15, Murayama Domiichi, retrieved from Wikisource
https://ko.wikisource.org/wiki/전후_50주년의_종전기념일을_맞아, https://ja.wikisource.org/wiki/ 戦後50周年の終戦記念日にあたって

[5]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27

[6] Ibid.

[7] 92세 前총리 “아베, 사죄문 대독시킨건 잘못, 조선일보, 2016-02-0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3&aid=0003133868&sid1=001

Politics on Human right of North Korean defectors


Politics on Human right of North Korean defectors

Yoon, Jaehyun
June, 2016

Global Politics is a dilemma between two political perspectives. One is Liberalism and the other is Realism. Liberalism sees each individual as the political actor, and the world is on the reciprocity between each political actor in a ‘marketplace’. Realism sees states as the political actors. Each state is like a ‘billiard Ball’ which has unified opinion by the nation’s people. These models do not fit perfectly on the contemporary international politics, but works as the mixture between two political perspectives. In other words, it is the point that politics of factual reality and ethical reality meet. North Korea’s human right and its defectors are especially on this phenomenon. I will argue how the international and South Korean deal with the North Korea’s human right and its defector happened between human right and national interests, and what is the priority goal.


The decline of North Korean defectors and their suffering.


North Korean defectors who entering South Korea decreased almost half from 2,706 defectors of 2011 to 1,502 defectors of 2012, and in 2015, only 1,216 defectors came into South Korea. North Korean defectors are sojourning about 4-5years in average, and female defectors increased as almost half of defectors after 1997[1]. According to Sungha Ju, defector journalist of Dong-A ilbo[2], it is because the borderline’s security became heavier with wire entanglements trap iron spike, camera, and alert bell in Chinese houses which is connected to Chinese police. According to Sisa Journal[3], in China, North Korean defectors are exploited in Labors and Prostitution, sometimes get married to Chinese man for survival. Even they come in South Korea, it is hard to stand alone by oneself in poor and impractical government support.


Under the president Park Geun-hye’s government, South Korea is talking human right of North Korea, but not requesting China to send defector to South Korea, or protect their individual security to not go back to North Korea in public. This is because of growing economic relation with China, and also China is traditionally alliance of North Korea. For the National interest, South Korean government is not making a strong statement about North Korean defectors in China.


But, still North Korean defectors are not able to enter South Korea in an easy way. Plus, According to Andrei Lankov, South Korean government has less capacity on reentry of North Korean defectors. It is because defectors are usually low-educated and sojourning in other states about 5 years, so they are less skilled people who lost the proper time for their education. According to Hwang, Jaeok from Wonkwang University, about 150,000 defectors are living in Northeast China illegally, and 15,000 babies are born from trafficked North Korean women.[4] At least, this means two factor. First, fast entering to South Korea is critical to reducing adaption cost of training and education program for North Korean defectors. Second, if South Korean government are about to handle this problem, it will be a tremendous cost even though it is the only issue about defector. This means no politician will take responsibility for this issue gladsomely. So defectors are in huge negligence politically, and majorly religious NGOs are participating on this matter. As Hannah ardent said, practically there is no human right without no state to support it.[5]


Perspective of China and Russia


China is becoming a big part of the world economy in free trade system. North Korea is becoming hot potato to China. According to Voice of America[6], North Korean restaurants overseas are not just for acquisition of foreign currencies, but also doing money laundering, drug, (methamphetamine, opium, and heroin, etc.) and counterfeit note trafficking. Plus, Nuclear weapon in North Korea is a serious problem to China, because North Korea is totalitarian state and to it is easy to be used in a temper of the dictator. Recent defectors’ case from the North Korean restaurants are being thought as connivance of china in some point[7] Even though North Korean restaurant workers were not illegal aliens, still, it does not make sense that Chinese government could not know about 13 North Korean’s travel.


But, China also may have some interest in North Korea even though there are some problems.

After WWII, North Korea had been the buffer zone of Communist power against U.S. hegemon. Even though North Korea has the Nuclear weapon, it is mainly against U.S. and South Korea and North Korea was cooperational with China and USSR. Important point is, China and Russia do not want militaristic strain on their neighbor and borderlines because it can hinder their economic development.


Recently, Chinese labor cost is growing, so import of North Korean labor is happening in China and North Korea. Also, the urbanization of China made decline on the farmer’s choice of marriage, so the human trafficking on North Korean defectors as brides would be working as one of the solutions of internal dissatisfaction of the rural area. Especially in the North East China, this region is getting the recession with poor international trade market of Russia and North Korea, so pressure on the trade of North Korea would not be the Chinese national interest at some point. Russia is also focusing on the development of Primorski krai, the far east of Russia as one of escape point against Russia’s strain between the Western world and Russia. this is why China and Russia are talking negotiation and cooperation as a solution to Nuclear weapon issue.


The perspective of U.S.


U.S. is one of leading state which is arguing liberalism and human right, but it was not so consistent actually. North Korean human rights are easy to be formed in the political use. Kang Chulhwan became famous because he met G. W. Bush who stated North Korea as one of “Four Evil”. However, Obama[8]’s policy was “strategic patience” but it was about violence on human right and nuclear weapon, but also like “unwilling to build its own coalition to constrain the North’s Proliferation and criminal activities”. However, the future of U.S. politics on North Korea, will be more like “the Obama administration’s approach to Iran”[9] or “No problem to speak with North Korea”[10] and both are related with China’s unhappiness and pressure to Pyongyang. One is assuming talk and co-operation with Xi Jinping, and the other is assuming “pressure on China”. Of course,


I cannot deny the negotiation is important to solve the problem, but it sounds like hegemonic global politics between China and U.S (with its balance of economic power) take the lead of negotiation on the human right issue. There are diverse factors which affect national strategy, but it is undeniable that U.S. strategy against North Korea has been changed with its government budget. For example, Obama’s strategy was “Pivot to Asia” which tried to escape from Afganistan and Iraq and concern more about Far east issues, but it has been failed with failure of escape from the Middle East.




North Korean people’s rights are easy to be formed in political use. South Korean insincere attitude on the defector issue, and shifting U.S. attitude makes me think human right is not the point. The point is the game of power for political hegemon. Voice of North Korean defectors[11] is politically used because of economic need, they are also love North Korean people as nostalgia to hometown, even though South Korea is good. According to Hwang Jaeok[12], defectors from the lower class in North Korea motivated to exit North Korea because of “survival”, not “Freedom”. But usually their voices were packaged as ‘escape for liberty’ or focused more on politics of victimization. Thus, it seems like there is no individual and normal people’s place on North Korea issue. It serves on Elite politics. If politics serves for the individual right, the government should do something to protect and support the defectors overseas to enter South Korea, and settling support. For this, Unification should not be the goal, because it frames the voice of defector which could be diverse at some point. In Contrary, Political use of the voice does not solve the poverty of the defectors, and it makes continuous “commodification” of opinion not practical competitiveness in Capitalism. This is an evil circle. Also, North Korean defectors’ poverty and lack of career in South Korea which is derived from long sojourning in China will decrease the will for better living and better condition of their cousin in North Korea.


Unification should not be the main goal, but Human right should be the prior goal. It might be accepting individual’s identity itself from North Korean defectors, and it will be a solution of politics of realism, that rule the people’s identity by the Government interests.

[1] 북한이탈주민 입국 현황, 국가지표체계, 통일부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694

[2] 주성하 기자 블로그,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111949

[3] ‘공포의 유랑지’ 중국 땅에 탈북자 10만명 떠돈다, 정락인, 시사저널, 2012.03.05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34265

[4] 탈북자도 유전무고, 무전유고(有錢無苦, 無錢有苦)?, 황재옥, 프레시안, 2013.11.28 09:48:00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843

[5] “Action, as distinguished from fabrication, is never possible in isolation; to be isolated is to be deprived of the capacity to act.”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6] Exclusive: N. Korea Uses Overseas Restaurants for Information Gathering, William Kim, 2016-04-08, http://www.voanews.com/content/north-korea-uses-overseas-restaurants-information-gathering/3277065.html

[7] `집단탈출` 북한 식당 탈북자…중국 정부 `알고도 모르는 척` 묵인 가능성, MBN News, 2016.04.11 11:04:00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6&no=264194

[8] ‘Strategic Patience’ With North Korea Gets You Nowhere, Michael Green, Jan 7th, 2016 http://foreignpolicy.com/2016/01/07/strategic-patience-with-north-korea-gets-you-nowhere/

[9] Clinton plans to use Iran playbook on N. Korea, Josh Rogin, (c) 2016, Bloomberg View May 18th, 2016, http://www.chicagotribune.com/news/sns-wp-blm-declassified-clinton-42ebe392-1d01-11e6-82c2-a7dcb313287d-20160518-story.html

[10] Donald Trump says he is open to talks with North Korea’s Kim Jong-un, Reuters, The Guardian, May 18th , 2016,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6/may/18/donald-trump-north-korea-kim-cameron-china-paris-climate

[11] “돈 많이 벌어 북한 가야죠”… 탈북자들의 진짜 마음, 신은미, 오마이뉴스, 2015-05-0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03674

[12] 황재옥, 2013.11.28

Comfort women and the politics of displacement.


Comfort women and the politics of displacement. (May 27th)

Jaehyun Yoon


The state is legal violence, it secures the human right of the majority, but also violate the human right of the minority. Without the human right, people cannot get private lives. Then people whose human rights are violated make voices with the solidarity in groups. The comfort women issue is one of the examples.

I think, not every Korean people in the colonial era was 100% Korean patriot. There was the difference of degree, and different values. Many Korean elites in 1930-1940’s gave up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re was the crash of values; traditional value, modern value, Confucian value, ethnic nationalistic value, etc. crashed on each other. One example of this phenomena is “theory of Eastern form and western matter”(동도서기론), which means philosophic ideas from eastern tradition and western technology and institutions. There could be some various understanding and interpretation of this idea, but It seems like some pro-japan Confucians and moderns of Korea thought “Japan” as the guardian of eastern ideology against western imperialism(Grand-Asianism 대동아공영론).

One example is “Iljinhoe”(일진회), they were, at some point, radical progressive of the time who wanted to reach modernity by Korea-Japan unification under Grand-Asianism. They thought this as a model of Austria-Hungary but it worked totally different with their thinking, and Lee Yong Gu, the leader of Iljinhoe said: “We acted like such a serious fool, maybe we were frauded from the start?”.1 Also, Ahn Jungeun’s assassination of Ito Hirobumi, the Japanese prime minister was also held because “Grand-Asianism did not come true”these mean Koreans wanted upward mobility or guarantee and security of rights in big picture, and some of them thought it as the form of independence.

So, it is possible that some comfort woman victim can say ‘some positive things’. Bae Bong-gi, a comfort woman victim said “During the war everyone, yes everyone, had a hard time. Nevertheless, I feel nostalgic… We all tried our best to help Japan win and I felt bitter [about Japan’s Defeat]. Yes, that’s true.” In the movie “Forest Gump”, a first nation sailor shows his manner which is very loyal to U.S. before he dies, he gives the whole money he earned to Gump, and he requests it to be sent to his family. Bae’s story sounds little bit similar with this. If it is not, why did she wanted the victory of Japan?

According to Jean Bethke Elshtain, individuals’ demand on publicity is made for the political right for their private life to be protected and respected. It is clear that one cannot give oneself a national order. Honor is born when it is given from the other people, in precise, it is given from representative of the people. It is state. Kikumaru, a Japanese comfort woman victim, committed suicide months after her interview about Comfort women issue. According to psychological interpretation, “she believed that she engaged in the performance of her duty as a gendered citizen under the wartime slogan “for the good of the country”.”2 But Japan’s defeat, “righteous justification of her life as patriotic Japanese subject evaporated, turning her into an object of scorn”3. It is the moment one’s private territory is publicized as the political right, and evaporated with defeat. In this moment, individuals do not have anything to be protect and be respected. It is the moment that the comfort women victims find what is exactly happened to each individual.

In this moment, Comfort women victims come out to protect their political right that is exploited and betrayed by the government. It is publicizing their exploited privacy in sex work. And publicizing always work in interest and respect from people. It is only able under the representation, and they are organizations. But still publicizing themselves means framing themselves in a certain political perspective. Because now Japanese government is the enemy who denies their privacy which is evaporated with publicizing “for the good of the country”, and under Korean government and Korean identity, identity “for the good of the (Japanese) country” is also unacceptable. They stand on the identity of ‘harassed innocent individual’ because publicizing is always for privacy. But in paradox, they cannot purely be honest on their privacy because it is already publicized.

In this point, I think the factual ‘truth’ is not important as the priority. Someone who want to protect one’s right and own identity of ‘Oneselfness’ cannot protect it perfectly by nature. The important thing is the consistent power of individuals as monads. According to Leibniz, monad’s concentration of power makes the extension; the form of material. The form is not determined by nature, but it is depending on individual’s will. These phenomena of power make the world in harmony. If I accept Leibniz’s idea, harmony is not made by revealing truth. Human cannot do that perfectly. Harmony and peace would be able to reach by individuals’ effort on their public right for privacy.



The Comfort Women, C. Sarah Soh, 2008, University of Chicago Press

Democracy on Trial, Jean Bethke Elshtain, 1995, BasicBooks

Discourse on Metaphysics, Gottfried Wilhelm Leibniz, 1686


[1] 한국 근대사 산책 5 :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강준만

[2] Sarah Soh, 148page

[3]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