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자유

by홍** in Facebook <철학> 게시판
인간에게 시간이라는 핑계이자 제한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나의 의견

사실 이해하기에 따라 홍** 님의 질문은 논센스가 됩니다.
시간이라는 전제조건 아래에 인간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시간이라는 가정이 없을 때 오늘날 우리와 같은 인간이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고, 가정이 달라진 만큼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시간이 없다면 인간이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 시간을 넘나드는 에일리언 or 프레데터일지도)

그렇기 때문에 질문에 대해 “잘 모른다”만 대답할 수 있게 됩니다. 첫째로 시간이 없을 때, 남아있는 그것을 과연 “인간”이라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고, 둘째로 만약 그것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의미에서 “자유”로운지 확신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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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떤 누구도 논센스를 물으려는 의도로 질문하는 것은 아니기에, 질문을 좀 다르게 이해해 보겠습니다.

A”인간이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또는 인간이 더 많은 시간을 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존재를 신과 같이 지금의 인간과 다른 존재라고 하지 않고, 아직 인간이라고 가정한다면)”
B”인간은 더 자유로워 질 것인가”

이렇게 가정한다면 A와 B는 얼핏 같은 말의 동어반복으로도 들립니다. 자유가 무엇이라 이해하냐에 따라서요.

“자유”가 뭐죠? 무엇으로부터 자유? 고통/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노예 상태로부터의 자유? 시간적 제약을 더 덜 받아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자체는 제약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이미 자유와 같은 말이 됩니다. 자유가 노예상태/무능력/약함으로부터 탈출이라 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자유=행복이라고 가정해본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됩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의 이유가 된다면, 그것은 아직 일을 한다는 것이 무언가에 도전/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전과 극복은 어디까지나 장애물(stress)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역설적으로 장애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능력/더 큰 도전은 더 큰 장애물을 인정하는 것이 되구요.
곧,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더 큰 장애물을 인지/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많은 장애물을 알고 겪게 된다는 것이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기 위해 공부합니다만, 공부해서 수많은 명제들을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명제는 곧 언어를 제한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더 많은 앎을 바라지 않고, 마치 플라톤의 동굴에 있는 사람들처럼, 동굴(무지)안에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둘 다 옳지 않습니다.

둘 다 옳지 않을 경우, 질문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다시 상기해봐야 합니다. 지금 질문은 “결국 인간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입니다. 그리고, “자유가 무엇인가”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자유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논할만한 가치(의미)가 있어야만 합니다. 의미없는 것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칭할 수도, 논할 수도,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유를 논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그러한 가치를 행복이라 하겠습니다. 행복을 무엇이라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논할만한 가치(의미)가 있는 것으로 가정하겠습니다. 저는 행복이라는 개념을 가정하고(칭하고) 있으니까요.

질문을 다시 정리하였으니 다시 주장을 풀어보겠습니다.

일단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결국 무언가를 해야 됩니다. 아무것도 안하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더 많은 것을 하게 되면 더 행복해 집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유로워짐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로워진다는 것, 더 행복해진다는 것은 더 많은 장애물(스트레스, 곧 고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행복과 스트레스는 같이 묶여있는 개념입니다. 어떠한 실체(thing)를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이해를 위해서, 거울에 실체를 다른 각도에서 비추어 본다고 가정하십시오)에 따라 각기 다른 양태(shape)로 보입니다. 그것(양태)을 하나는 행복, 하나는 스트레스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같은 것을 달리 부르는 것이거나, 같이 묶여서만 이야기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자유란 행복과 불행의 증가를 의미하고, 더 많은 제약을 앞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 그것을 인간이 도전/극복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제약이 사라진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나게 됩니다.
즉, 시간이 인간이 도전/극복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냐, 시간은 인간이 도전/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시간이 인간이 도전/극복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시간이라는 제약조건이 인간의 노력/의도와 상관없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극복할 수 있는 장애물이 없어짐으로, 곧 더 자유로워질 가능성도 사라집니다.
-.>시간이 인간의 노력/의도로 인해서 사라진다면
인간은 장애물을 극복함으로, 더 자유로워집니다.

시간이 인간이 도전/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시간이라는 제약조건이 인간의 노력/의도와 상관없이 사라진다면
어차피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없어짐으로,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역량 증감과 아무 상관이 없음(의미가 없음)
->시간이 인간의 노력/의도로 인해서 사라진다
가정 자체가 불가능함(절대적인 것)

따라서 시간의 제약이 사라지는 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순간은, 그것이 인간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 극복하였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가령, 어느날 부모님이 시간적 제약을 치워주었다, 또는 복권에 당첨되어서 맨날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시간을 단축해도 된다. 이런 것은 딱히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도전하지도 않았고, 도전할 것도 없으니까요.

결국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의미있게 활용하는 것, 그리고 의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도전할 거리를 찾아내는 것) 즉 노오오오력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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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 영혼, 그리고 가상세계로의 복제/구현

<철학>게시판에 재미있는 글이 있어, 답글을 쓰는데 너무 길어서 댓글 작성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블로그로 옮겨 보았다.
원글 : By 김영준 님

그룹에 글을 쓰는 게 몇 년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 한계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글을 씁니다. 제 덧글을 통한 제 피드백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 글을 키워드로 미리 요약하자면, [자유의지, 시뮬라시옹, 양자물리학, 영혼, 뉴런, 뇌과학, 커넥톰 입니다.]

제목은 <과연 영혼은 있을까? 우리 세상이 가상 세계일 가능성은 있을까?> 입니다.

1. 몇 년 전 접하고 최근까지도 제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실험이 ‘예쁜꼬마선충’ 관련 실험인데요, 검색을 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해당 실험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뉴런의 갯수가 몇백 개에 불과한 이 벌레를 잘게 잘라 포를 뜬 다음 이 벌레의 뉴런 구조를 가상 공간 속에 그대로 구현했더니, 이 벌레가 오프라인 벌레의 행위를 똑같이 따라 하더라는 내용입니다. 자극을 수용하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이는 마치 로봇을 조립만 해 두고 소프트웨어를 깔지도 않았는데 로봇이 자극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해당 구조를 다시 오프라인 속 로봇/생체에 씌웠더니, 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로봇과 생체가 사전에 명령받지 않은 수용/판단/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2. 이 실험은 우리에게 ‘우리 인간의 자극 수용/판단/이에 따르는 행동은 영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라는 당연해보이던 명제의 참 여부를 의심하게 합니다. ‘비교가 어렵지만 파악이 불능하지는 않을 정도로’ 뉴런의 갯수가 많은 인간이 이 실험의 대상이었다면, 가상 공간 속 인간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아마, 식욕, 성욕, 배설욕 등은 기본으로 가지고 이에 따라 자극을 수용하고, 판단하고, 행동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식량을 시각으로 감각하고, 먹을까 말까 판단을 한 다음, 섭취했겠죠.

이는 언어를 배우지 않은 / 사회화를 경험하지 않은 인간의 삶의 형태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인간이 가진, 다른 동물과 차원이 다른 사고의 폭이, 언어적 한계의 폭에 종속된다고 판단합니다. 이 때의 언어란 특정 구체적 언어(영어나 한국어)가 아니라, 인간이 교류를 위해 사용하는 감각 기호의 일체를 의미합니다.

3. 인공지능과 뇌과학 연구의 핵심 키워드들 중 두 개가 ‘빅데이터’와 ‘커넥톰’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커넥톰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뇌과학은 추론합니다. 이 커넥톰은 ‘뉴런 사이의 연결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예쁜꼬마선충에게도 커넥톰이 있었고, 그 커넥톰을 그대로 복사해서 가상 공간에 구현했던 실험이 1번의 실험이었습니다.

4. 생리적 욕구, 충동, 감정, 언어 등이 영혼의 몫이 아니라면, 과연 영혼만이 가지는 차별화된 특질은 무엇일까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실존 여부를 질문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존재’ 여부를 의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해야한다는 뜻입니다.

5. 제가 가지는 ‘인간의 자유 의지의 한계’에 대한 의심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경험들은 물론이고, 그 경험들로부터 해 내는 판단과 정돈 역시 물리적 영역에 유물론적으로 종속된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가진 것 처럼 보이는 추상적 사고 능력 역시, 인간이 ‘만들어 낸’ 언어의 틀에 한정되어있고요. 저는 인간에게 미시적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가 인간의 물리적 육체와 언어의 틀 내부로 종속된다고 보며, 이에 따라 인간에게 거시적 자유의지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예쁜꼬마선충에게도, 원숭이에게도, 미시적 자유 의지는 있습니다. 그들도 자극을 수용하며, 과거 경험과 본능을 바탕으로 판단을 하고, 누구의 조종을 받지 않은 채 스스로 판단합니다. 다만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이들보다 한 단계 더 ‘메타’적인 사고를 할 뿐입니다.

6. 1~5를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지금 인간 세계와 똑같은 가상 세계를 구현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제겐 매우 합리적이어보입니다. 나아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구현된’ 세상인가 라는 의문에는, 저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양자 얽힘, 관찰 여부에 따른 빛의 속성 변화(입자/파동) 등의 관찰된 다양한 사실들 등을 바탕으로 추론해본다면, “그럴 개연성이 충분하다”라고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 주석 : 관찰 여부에 따라 빛의 형태가 입자나 파동으로 바뀌는 현상은, 관찰되는 영역만 픽셀(입자)로 렌더링하고 관찰되지 않는 영역은 데이터 처리 부담을 줄이기 위해 벡터(파동)로 디자인되는 가상 공간과 비슷해 보입니다.

7.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가요. 궁금합니다.

나의 의견

글의 난해한 부분은 영혼, 자유, 등 많은 개념들이 서술되지만 명확히 서술되지 않고, 대강의 의미로 이해되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서술하는 이유가 충분히 서술되지 않는 부분에 있습니다.
 
1. 자유
 
가령, 거시적/메타적/미시적 자유의지의 구분을 봅시다. 원숭이 앞에 바나나와 딸기를 두엇을 때, 바나나를 선택할지 딸기를 선택할지 모르는 것을 미시적 자유의지라 이해해 보겠습니다. 메타적 사고로서 자유의지도 자기자신을 반성/반추하는 것이라 생각해보면 되겠지요. 거시적 자유의지는 뭔가요?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언어, 사회화, 등의 한계에서 제약된다는 점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시는건가요?
 
거시적 자유의지를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건가요? 지금부터 저는 “자유의지”를 좀 뭉뚱그려서 “자유”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자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자유를 제약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확실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자유가 단순히 제약되지 않음, 무엇이든 할 수 있음, 그런 것이라 정의할수록 자유는 모순적인 개념으로 변합니다. 가령 옳음, 좋음, 행복 이런 것들 말입니다. 사람이 자유롭다고 멋대로 비싸고 맛없는 메뉴를 고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게는 맛있으면서 양도 충분한 메뉴를 고르죠.
 
자유를 어떤 명제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개념들과는 그런 점에서 차별성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에, 마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노래처럼, “왜 하고 싶은데?”라고 묻고 “이러해서 하고 싶어” 라고 답이 나오면 “그럼 왜 이러한데?” 라고 캐묻고 또 묻다보면 결국 멍청하게 대답할 구석이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질문을 받는 사람은 자기자신의 가장 멍청한 부분을 확인하게 마련이고 질문한 사람은 꿀밤 한대 얻어맞게 마련입니다. 사람대 사람이라 귀엽게 서술하는 것이지, 국가 대 국가의 문제였으면 전쟁이 날지도 모르죠. 아무튼, 그래서 자유는 그런 게 아닙니다.
 
자유는 오히려 “무엇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난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해. 난 그것에 따르지 않을 거야, 저항할 거야, 이런 것들. 물론 어떠한 환경(궁핍함, 불만족 등)들이 그런 저항/불복종을 유도했을 수 있지만, 어쨋든, 저항의로서 자유는 명제로서의 자유와는 달리 어떤 결론이 날지는 일단 미지수로 남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 그 자체의 속성(제약되지 않음, 결과를 알 수 없음)에 가깝습니다.
 
(이 문단은 중요합니다.)“~이다”로 끝나는 것을 “명제/개념/명사” 라고 표현해도 좋다면, 자유는 “반명제/반개념/반명사”라고 표현해야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명제/개념/명사들이 실제로 있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쓰인다면, 반명제/반개념/반명사는 실제로 없는 것 (또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쓰이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명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명제”로서 자유가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다”와 “없다”를 말했지요. 저는 여기서 생각해본적이 있는데, 사실 “없다”는 “있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을 상상해봐”라고 질문하면, 아무리 기상천외한 괴물을 상상해도 혹자는 지느러미를 가진 괴물 뿔을 가진 괴물, 어쨋든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가지를 조합한 괴물을 상상해내기 마련입니다. 결코 무에서 유를 상상해내지는 않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없다”도 “있다”에서 상상해 낸 것입니다. “없다”는 것을 본사람도 없고 알지도 못하고, 따라서 결국 “있다”에서 상상해 내는 것입니다. 자유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구상된 개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건데, “없다” 가 없으면 역설적으로 “있다”가 무의미해 질테니 결국 “없다”가 이야기 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자유/신 같은 것들도 끊임없이 이야기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들이니까, 결코 -이다.라고 종결(명제/개념/명사)될 수 없는 개념이구요.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결코 단순한 <허구>가 될 수도 없습니다.
 
왜 허구가 될 수 없느냐, 오히려 자유는 그 한계 때문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런 한계가 있고, 이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한계를 벗어나고 싶다 그 결과물이 “무엇이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 이것이 자유의 출발점입니다. 자유는 처음부터 한계없이 말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동시에 없는것을 추구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의미가 있다는 것은 곧 말로서 표현된다는 것을 말하니까요. 대개의 모든 저항이 그렇듯이요. 물론 그 저항들이 상상하던 세계를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만약 자유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자유가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5번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한계”라고 말씀하신 부분, 즉 거시적 자유의지가 불가능하다는 부분은 자유를 어떻게 이해하냐에 따라 논파됩니다. 자유가 한계를 가지는 순간은, 한계지어질 수 없을 때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브라흐마 신처럼 말입니다. 동력을 상실할 때, 모르는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무슨수를 써도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때가 자유라는 개념이 허구가 되는 때입니다. 그런 것이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적어도 제게는 모르는 것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2.가상세계 구현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예쁜꼬마선충을 컴퓨터상에서 구현해 내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인간의 뉴런 연결망을 그대로 컴퓨터상에 구현해 낸다는 점이 곧 “가상의 세계를 복제하였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쁜꼬마선충이라는 제약된 세계, 인간이라는 제약된 세계를 컴퓨터라는 가상환경에 구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뇌를 똑같이 구현해서 컴퓨터라는 통속에 담아둔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의 인간은 세계라는 통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통이 과연 통인지 된장인지 아직 인간은 “모릅니다”. 마치 트루먼이 트루먼 쇼 세트장의 외벽에 도달하듯, 통속의 뇌는 열심히 사고하고 알다 보면, 플라스틱 통이라는 한계를 알게 되지만, 현실의 인간은 자신의 외부 환경을 채 알지 못합니다.
 
설령 가상세계의 인간과, 그 인간이 담긴 엄청난 가능성의 가상세계(A)를 구현해 낸다 할지라도, 그 가상세계가 현실 인간의 세계(B, B include A)를 구성하고,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가능성의 가상세계(A)만큼 B도 A만큼 확장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상세계를 똑같이 구현해낼 수 있다는 주장은 불가능합니다. 그 가상세계의 크기만큼의 갭이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에 펼쳐지게 됩니다. 만약 가상세계가 무한대의 크기라면, 현실세계는 (현실세계의 크기)x(가상세계의 크기)만한 크기가 되기에 똑같은 무한대라도 결코 같은 질적으로 같은 “무한대”는 아니게 됩니다.
 
다만, 현실세계의 인간이 가상세계를 확장하는 것, 즉, 통속의 뇌를 꺼내서 더 넓은 통으로 옮겨주거나, 현실 세계에서 뇌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동시에 가상세계(A)는 곧 현실세계(B)로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것을 “창조”라고 불러야 될까요?(이것은 영혼을 논할 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아이를 낳는다는 행위는 그렇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아이에게 자궁이라는 세계를 벗어나 현실세계를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불완전하게도, 윗세대가 경험한 세계를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것의 연장선상의 세계로서의 세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가 윗세대의 세계를 살지 않는다고, 아이의 세계를 가상 세계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생각해보니 어쩌면 가상 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편협한 개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제국주의 시대에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서 2번주제는 일단 줄입니다.
 
3.영혼
 
무엇을 인간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인간 영혼에 대해서 정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단 기독교도와 불교도가 영혼에 대해 무턱대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답없는 상황도 없을 테니까요. 혹자는 실존을 말할수도 있고 혹자는 물질과 정신의 구분으로서 말할수도 있고, 아무튼 요점이나 뉘앙스나 무엇을 논하기 위한 영혼인지, 이런 점들이 너무 막연합니다.
 
다만, 자유를 논하면서 저는 “한계”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유가 있게 된다, 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있다”로서의 세계)가 바로 한계가 되고, 그것때문에 “(아직은) 없다/모른다”로서의 자유가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유는 세계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자유를 가진 인간 또한 세계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 또한 비슷하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영혼이라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영혼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인간이 그렇듯이 세계와 밀접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상 세계에 지금의 인간이 가진 영혼으로서, 예쁜꼬마선충의 영혼으로서의 영혼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에 인간과 예쁜꼬마선충은 그 신체 뿐 아니라 그 환경이 구성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상세계에서, 가상세계를 알고자 하는, 그리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없는 것을 상상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영혼으로서 개연성이 있다고 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영혼이라고 인정한다면, 그것을 창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한건 똑같이 복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영혼으로서 개연성이 있는 모사-영혼에 불과한지, 아니면 창조물로서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지는 결국 그 세계에서 자유가 가능한가/불가능한가의 여부, 즉, 끊임없이 극복할 “한계”를 생성해내는가, 알고자 하는 의지와 앎이 고갈되지 않는가 하는 부분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통속의 뇌 담론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서 이만 줄입니다.
 
**영준님은 예전에 제가 요 게시판에 의사소통과 폭력에 대한 글을 썼을 때 이런 저런 답을 해 주신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글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그 글과 같이 생각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쨋든 “커넥툼”(연결총체)에 관한 것이니까요.

“없다”로서의 자유, 생각에 종속된 나

1.생각은 빌라 경비 아저씨 얘기에서 흘러나왔다.

빌라 경비 아저씨는 어느 날부터 출근을 안 하게 되었다. 아파트 사람들하고 너무 잘 지내서, 때로는 매일같이 인사하다보니 피해서 돌아가게도 되는, 정 많은 분이었다. 팔순이 꺾여서도 일 하시는 늙은 경비원이었다. 화단이나 빌라 뒤 잡목이나 잡초들도 사람이 확실히 관리가 되었다.

어느날부터 출근을 안 하게 된다고, 덤덤히 말하시더라. 경비 아저씨가 몇 달 전에 “멍청하고 답답한 짓 하지 말고 작고 보잘것 없어 보일지 몰라도… 전혀 그런 것 아니니 가서 일해라.”라고 꾸중했던 게 생각났다. 나는 일하고, 아저씨는 그만 둔다. 그렇다.

아무튼 그 때부터 경비 아저씨는 안 나오게 되었고, 그래도 간혹 동네에서 마주치고 그랬다. 보면 동네에서 운동하시는 것 보고, 종종은 역전에서 보기도 하고 그랬다. 나는 지각쟁이라 정신없이 뛰어가다 대강 인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제 생각해도 죄송스러움만 남는다. 그것도 내가 먼저 하는 게 아니라 어른한테 먼저 받고 대답하는 인사였지.

그러다 여름 때 일요일 날 뵈었던 때에는,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었다. 다른 건 모르지만 손을 꽉 쥔 것은 기억한다. 왠진 모르겠는데 노인분들 손 힘은 우악스러운 경우가 많아. 하지만, 아무리 그 분이 정정해 보여도, 그 분이 “낮선 세계로 진입했다.”는 것은 알았다. 하루의 루틴과 생활의 마인드가 완전히 깨지는 그런 순간 말야. “이 세계에서는 이런 아이덴티티를 갖지 않으면 환영받기 어렵습니다.”라고 내 몸이 말해주는 그런 때 말야.

나는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겨울이 되었고 아버지가 문득 그런 말씀을 했다. 몇일전에 경비 아저씨를 동네에서 봤는데 폭싹 늙어 있었다고. 사람이 폐인이 된 것 같다고. 일을 멈추면 그렇게 된다고. 하기야 우리 외할머니도 그랬어. 시골에서 일 좀 그만 하라는 말 들으면서도 밭 일구던 분이 제 발로 병원에 가고, 요양원 가시더니 그대로 몸을 못 가누게 되었었지.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만 두신 게 아니라 해고되었다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아차 하고 다치거나 쓰러지기라도 하면 빌라 측에서 병원비를 지불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나이에는 건장한 사람도 짤릴수 밖에 없다. 그런 것이었다.

새 경비가 고용된 적이 없어서 그렇게는 예상하지 못했다. 놀랐지만, 순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이라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누가 옳다 그르다는 게 아니라, 의견을 만들 수 있고,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할 수 있는 일이 아냐. 그런 세계를 알아버렸다.

 

2.생각은 실타래 처럼 이어져서, 내가 일전에 자유와 운명에 대해 궁리했던 것을 상기하게끔 한다.

그런 자연스러운 일이 누구에게나 닥친다. 누구는 밭을 일구다 밭에서 벗어나고, 누구는 학교를 다니다 학교에서 벗어나고, 누구는 강단에 서 있다가 강단에서 벗어나고, 누구는 경비를 그만두고, 나의 믿음이나 나의 가치 같은 것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또는 그런 것을 들이밀기 어려운 것들이 있어.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자유를 들이밀고, 재고, 따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냐.

자유를 어떤 명제로 표현하라고 하면 이것 저것과 모순된다. 행복, 좋음, 옳음, 이런 것들과 부딫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같이 설 수 있겠어. 하고 싶은 것, 옳은 것, 족할 수 있는 것… 마치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노래처럼, “왜 하고 싶은데?”라고 묻고 “이러해서 하고 싶어” 라고 답이 나오면 “그럼 왜 이러한데?” 라고 캐묻고 또 묻다보면 결국 멍청하게 대답할 구석이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자기자신의 가장 멍청한 부분을 확인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자유는 그런 게 아니다.

자유는 오히려 “무엇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가깝다. 난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해. 난 그것에 따르지 않을 거야, 저항할 거야, 이런 것들. 좋아, 그것을 따르지 않아도 좋아, 그럼 이제 어쩔꺼야, 이제 무엇이 맞는가, 라고 하는 순간 단두대와 로베스피에르 같은 사람들이 튀어나오겠지. 자유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가장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사람들이 튀어 나올 거야.

“~이다”로 끝나는 것을 “명제/개념/명사” 라고 표현해도 좋다면, 자유는 “반명제/반개념/반명사”라고 표현해야 좋을 거야. 명제/개념/명사들이 실제로 있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쓰인다면, 반명제/반개념/반명사는 실제로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쓰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다” 가 없으면 역설적으로 “있다”가 무의미해 질 테니, 그렇기 때문에 자유/신 같은 것들은 끊임없이 이야기 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들이니까, 결코 -이다.라고 종결될 수 없어.

결국에 있다, 없다, 무엇이다, 아니다, 좋다, 그르다.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만 의미를 갈구할 뿐이야. 그 의미가 어떤 것이 될 지는, 어떤 것 “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고 계속해서 찾을 수 밖에 없는 거다.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의미찾기는 멈출 수 없어.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생각과 다른 말이 아냐. 멈출 수 없는 것은 나의 통제 밖이고, 나 자신보다도, 나의 의지보다 큰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나라는 도화지 위에 나의 생각을 끄적인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인 거야. 생각이라는 도화지 위에 생각보다 작은 “나”를 그리는 거고, 의미라는 도화지에 나를 그리는 거야.

결국 그림을 자유로이 그리고 싶다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싶다면, 도화지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몰입해야 한다. 내게 주어진 환경에, 내가 가진 모든 것에 몰입해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든 의미를 말할 수 있겠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좋든 싫든 말야. 그림이 못생기고 잘생기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단 그리기는 해야 할 것 아냐. 도화지는 나의 상상보다 작고 보잘것 없는 공간일 지 모르나,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나를 그릴 수 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이 때로는 인간답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다울 수 있다.

몰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수많은 갈림길이 나오고, 어느 쪽을 어떻게든 택해야 한다. 문득, 꿈속에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나 나는 운전을 하고 있다. 고속도로에서 브레이크를 세우고 출구를 나갈지 계속 갈지 택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택해야 한다. 길을 택해서 가다가, 너무 오래 가 버려서, 다시 과거의 갈림길이 생각나는 순간이 오면, 너무 고통스러울 거야. 그렇지만, 그게 너무 자연스럽고(너무 맞는 말이고), 너무 쉬워서, 그래서 말문이 막히도록 교차되고, 그래서 덧없게 지나가 버리겠지. 갈림길 중 어느 쪽을 택해도 그러겠거니 한다. 어쨋든 나는 죽으니까, 그러겠거니 싶다. 커다란 의미가, 한순간에 그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먼지처럼 날아가 버릴 수도 있어. 딜레마의 환희와 고뇌 따위는 잊어버리고,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이 새로운 것들이 생각 한켠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도 있어.

만약 그런 순간이 오면 박쥐가 되어 버리자. 내 말을 모두 다 뒤엎어 버리자. 다른 것에 몰입해 보자.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이… 잠깐 여행을 가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볼 것 다 하고 할 것 다 보고, 정신없이 여행하다가 오자. 그리고 나서 박쥐가 되어 버리자.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그렇게 중요치 않아. 사람들이 어떻게 봐 줄 지도 그렇게 중요치 않아. 그것은 어쨋든 내 최선의 결정이니까, 어색해 하고 말문이 막히고 답답하다고 해도, 결국 자연스럽게 할 말이 없게 될 거야. 덧 없게 말야. 그러면 나는 적어도 계속해서 도화지를 갖고 궁리할 수 있을 거야. 무엇을 그려야 하나, 무엇을 그리고 있었나, 이 선을 그리면 무엇을 튀어나올까, 이 선을 지우면 무엇이 새로 보이는지 하면서,

그렇게 하다 보면, 내가 없어도 누군가 내가 그리던 도화지를 만지작 거리던지, 아니면 내가 겪었던 실수를 똑같이 하는 걸 보고 멍청한 놈이라고 속으로 속삭이던지 할 수 있지 않겠어. 뭐 그 정도면 족하지 않아. 누군가한테 떠들어 댈 게 있으니까. 적어도 그럴만한 껀덕지는 생기니까.

 

이쯤 생각하니, 생각이 산만해져서 나를 자유롭게 해 줬다.

 

 

 

공포와 행동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귀를 하나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나는 사르트르의 <구토>를 앞 부분만 간신히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두 대목을 인상깊게 기억한다. 첫째는 롤르봉이 공포로 지식인을 설득한 것, 둘째는 트럼프 치는 인물들을 영혼없이 묘사하는 부분이다. 그 중 롤르봉의 일화를 그대로 소개한다.

‘1787년에 물랭 근처의 어떤 주막에서 디드로의 친구이며, 철학자들에 의해서 교육을 받은 한 노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근처의 신부들은 지쳐 있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노인은 종부성사를 거부했다. 그는 범신론자였던 것이다. 드 롤르봉씨가 거기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신앙이라고는 갖고 있지 않았으나, 물랭의 신부들에게 병자를 기독교 신자의 감정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자기 같으면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내기를 했다. 신부가 내기에 응했다가 졌다. 아침 3시에 시작해서 병자는 5시에 고해를 하고 7시에 죽었다.

<당신은 토론의 기술이 능하십니다그려. 우리는 어림도 없습니다.>라고 신부가 말했다.
그랬더니 드 롤르봉씨는 대답했다.
<나는 토론을 하지 않았지요. 지옥이 무섭다는 것을 말해 주었을 뿐이지요.>’

사람은 공포로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오늘 공포로 움직였다. 합리적이지 않음은 질책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합리성은 언제나 공포 다음의 일이다.

왜 그러한가? 모든 결과/대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유를 설명해야 하게 마련이고, 그 원인/이유 또한 그 위의 원인/이유를 묻게 마련이다.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과정은 <이렇게 원인을 찾는 것은 영원할 것인데, 영원히 계속된다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하는 질문을 하게끔 만든다. 여기서 그것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고, 이 질문은 그것이 의미가 있을/없을 대상인 나 자신을 상정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겠다.

바로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할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는 나의 실존/내던져짐/현존재/있음에 대해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끝나지 않는 고민을 누군가는 고통이라고, 누군가는 공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엔 고통은 일정한/정적인/연속적인/선형적인 흐름으로서 존재상태를, 공포는 강조점 있는/동적인/무게감있는/사건위주의 점으로서의 존재사건으로 묘사하겠다.

그래서, 공포는 하나의 사건을 만들고, 나의 삶에 일정한 변곡점/변화의 포인트를 준다. 공포는 그것을 헤어나오고자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하게 만든다. 실존은 의미를 갈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의미를 갈구하는 것은 의미를 다른 이에게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달하거나 강제하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상태이다. 실존에 내재된 이러한 의사소통의 피할수 없는 폭력성은, 다른말로 한다면 인간의 모든 관계가 폭력을 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포 때문에 그 폭력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관계를 유지한다. 관계 없이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의미를 갈구하지 않으면 내 스스로의 존재감(자존감/실존)을 불편하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간정리하자면, <인간은 사회적이다>는 <인간은 폭력적이다>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사회는 공포 속에서 그 불편함을 극복하며 존재하게 된다. 그 구성원들의 실존/자존감/정체성을 만족시키면서.

추신) 다른말로 하면 공포-의미의 갈구는 곧 믿음의 갈구와 같다. 사회는 믿음의 공동체이고,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사상/종교를 피할 수 없다.(아 그리고 난 크리스트교인은 아니다. 오해할까봐.)

이 글은 오늘 내가 새로운 모임을 시도하였고,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고, 그 모임이 어느정도 불편했지만 계속 시도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