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놀이 01

이산 놀이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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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앞서 오류 두 가지를 안내하고자 한다.

1.”신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신의 존재성을 증명한다.”
2.”뭔지는 몰라도 문제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오류다. 하지만 그렇기 떄문에 주체의 불완전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 글에 앞서 주어(또는 주체)는 미시적으로는 ‘나’ 거시적으로는 ‘너’ 또는 ‘인간’을 뜻한다고 주장하겠다.
짧은 글이기 떄문에 왜 이런지는 설명할 생각이 없다. 그냥 내가 이러하게 가정하고 시작하니 가정하에 이 글을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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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창조’로 시작되는 창세기는 ‘다스리라’, 그리고 ‘보기 좋았더라’로 1장을 마무리한다.
풀어 말하자면, 나는 이 글을 공간이 있고, 공간 안에 무수한 대상이 있고, 대상은 일의 대상이 되고, 일을 하는게 마땅하다(좋다)고 이해한다.
어떠한 바탕이 있다고 치면, 그제서야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간(바탕)의 존재(있음)을 상정하면 대상(것)이 있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간 내애서 대상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하는 것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고 구분의 문제다.
대상은 ‘어떤 것’이다. ‘것’은 ‘덩어리’가 있다. 덩어리가 있다는 말은 그것이 그것이 됨, 즉 덩어리이거나 아님을 말하는 끝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구분의 문제다.
구분은 공간을 어떻게 부를지를 풀어서 말하는 것이다. 이 공간은 빨간색이고 이 공간은 파란색이다. 이 공간은 나 이고 이 공간은 내가 아니다. 이런 식이다.
부른다는 것은 이것은 어떠한 것이다, 라고 어떠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속성, 특징을 부여하는 것이다.
부르는 것은 일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일의 대상이 된다, 다루어진다는 것은 그것에 방향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방향성이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이고, 그 의미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은 하나의 덩어리고 덩어리는 끝이 있었다. 방향이 부여되기 전에는 끝은 그냥 끝일 뿐이지만, 방향이 부여되면 끝은 처음을 상정한다.
처음에 어떠한 특징이 대상에게서 발현되고, 그것이 어떠한 끝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주석 1)
불리는 것이, 즉 관찰되는 것이, 일의 대상이 되어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왜 마땅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앎을 추구한다고 했다. 앎이 대상 안에 있는 것인가? 인간이 대상에게 부여하는 것인가?
후자라면 인간이 대상에게 앎의 대상 즉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인간이 무언가를 한다.”로 지칭할 수 있다.
무언가를 하면 지루하지 않다. 그건 보기 좋다.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볼 만 하다.
일을 하기 위해서 인간은 공간을 가정한다.
맨 앞서 말했던 1번 문장에 빗대어 말하자면 ‘일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일의 존재성을 증명한다.’
마치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되듯, 일은 어떠한 것, 즉 일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일은 대상을 증명한다.
이 글은 오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체의 불완전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주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주체의 존재성을 증명한다.’
이 글은 오류다. 하지만 그렇기 떄문에 주체의 불완전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주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주체의 존재성을 증명한다.’
이 글은 오류다. 하지만 그렇기 떄문에 주체의 불완전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

/*이 글은 탈출구가 없는 반복문이다. 여기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
주체는 작은 의미에서 ‘나’, 큰 의미에서 ‘인간’이다.
일은 인간을 증명한다. 또는 무한 소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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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어리는 쪼개진다. 그 쪼개진 것 중 일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불리는 것이다. 바위를 깎아냈을 때, 돌은 돌, 자갈, 가루로 나뉜다.
만약 돌, 자갈, 가루가 나뉘고 내가 그 일을 한 목적이 큰 돌을 가져가기 위함이었으면 그것은 더 이상 돌, 자갈, 가루로 불리지 않는다. 돌, 자갈, 모래, 먼지로 불리지도 않는다.
바위는 ‘돌’과 ‘나머지’가 된다. 나는 그 대상들에 가져갈 것, 가져가지 않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가져갈 것과 가져가지 않을 것은 ‘덩어리’를 나눈다. 그렇게 해서 한쪽 덩어리는 ‘돌’이고 한쪽 덩어리는 ‘나머지’다.
‘돌’과 나머지’는 떨어져 있다. 그것을 ‘돌’과 ‘나머지’로 부르기 위해서는 떨어뜨려 놓아야만 한다.

부피는 넓이의 모음이다. 넓이는 선의 모음이다. 선은 점의 모음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부르기 위해서 떨어뜨려 놓아야만 한다.
부피를 다루면서(즉, 부피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점을 부른다면, 그리고 점을 다룬다면 부피는 부피로서 덩어리를 갖지 못한다.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점을 다루면서 부피를 부른다면 부피는 점들일 뿐이다. 점들은 덩어리를 가진다. 부피는 점으로서 덩어리들이다.
점을 다룰 때에 점은 그 자체로서 덩어리여야만 한다. 모든 덩어리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부피는 부피 자체로서 덩어리일 필요가 없다.
덩어리는 쪼개진다. 점을 쪼갠 덩어리는 그 자체로서 덩어리여야만 한다. 점을 쪼개면 점이 생긴다. 왜냐하면 나는 점에 마음을 두기 때문이다.
만약 부피를 다루면서서 점을 부른다면, 그리고 부피 자체가 덩어리이어야만 한다면, 점을 다룰 수 없다.
부피를 쪼갠 덩어리들은 부피여야만 한다. 모든 덩어리는 부피다. 부피를 쪼개면 부피가 생기고, 모든 점은 부피다. 왜냐하면 난 부피에 마음을 두기 때문이다.
덩어리 끼리는 떨어져 있다. 이어지지 않았다.(연속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덩어리와 덩어리가 떨어져 있는 그 사이는 무엇인가?
그러함은 다루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의미가 없다) 그러함은 부르지 않는다.(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함은 있지 않다.(존재하지 않는다.) (주석 2)(주석 3)

바위가 쪼개진다. 바위는 돌을 얻기 위해 쪼갰고, 돌 외에 신경쓰이는 것, 걸리적거리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큰 돌과 작은 돌이 나온다. 그 외의 것은 없다. 모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없다.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루는데 있어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과 돌은 떨어져 있다.
떨어져 있는 그 사이는 다루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부르지 않는다. 있지 않다. 돌을 얻었다. 일을 마쳤다. 우리는 일을 했다. 우리는 일을 돈으로 바꾼다.
돈은 쪼개진다. 돈은 오만 원, 만 원, 오천 원, 천 원 짜리들이다. 그 외는 없다. 다루지 않는다. 서로 오만 원, 만 원, 오천 원, 천 원짜리들을 나눈다. 돈을 갖고 일터를 나온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독자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다. # 문단의 2번 오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생각을 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주석 1 : 마치 메모리에 데이터가 있는데, 그것을 냅두면 그것은 쓰레기 값이지만 인간이 다루기 위해 주소값에 포인터를 지칭해주면 그것은 무언가가 된다.
그리고 일을 안할거면 귀찮게 포인터를 지정해 줄 일도 없다.)
(주석 2.덩어리는 열린 집합이다. 열린집합은 경계를 포함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점을 다룬다면, 점은 덩어리이기 때문에 열린 집합이다. 그러한 경우 부피는 점의 모임이다. 부피도 열린 집합이다. 그러나 어떤 점이 부피이고 어떤 점이 부피가 아닌가의 구분은 또 다른 문제다. 생각할 수 있는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주석 3.이 부분은 일전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괴물에 대한 상상’으로 설명한 부분이 있다. 그때 인간은 없음을 증명하지 못하지만, 있음을 말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없음을 말할수밖에 없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금은 짧은 글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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