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와 아이티간의 국외거주자 문제를 보고 생각해 보았다.

1.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간의 관계를 몇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본다면
-프랑스와 스페인에 의한 분계선 설정, 각각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사용
-경제적 격차 및 아이티의 국가적 재난으로 아이티계 난민 대거유입
-과거 정부 독재자에 의한 지역감정 조장 및 전쟁, 학살

정도가 될 것 같다. 이는 남북한의 현재 상황을 돌아보게 하는데

-미국과 소련에 의한 38선 설정, 각각 영어계 및 러시아어계 외래어 사용 및 사투리라기엔 언어적 격차가 벌어지고 있음.
-경제적 격차 및 북한 붕괴시 북한 난민 대거유입 가능
-과거 반공 및 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대립 및 전쟁, 학살

이러하다. 지역감정이나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투표자->후보자 또는 시민->정치인의 의사전달 과정을 반대로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 지역민이 지역이익을 위해 지역감정을 보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지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곧 지역적 프레임에 갇힐 필요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갇혀 버리는 것임. 소위 충청도 핫바지론 같은 것도 있고 정치인 발 지역감정 조장 사례는 많음. 그리고 외주 노동자를 추방하는 것도 비슷한 프레임으로 이용되는 것이 있는데, 일베나 오유나 웹상에서 팽배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함.

외국에서 오는 이주노동자들이 쉽게 불법을 저지른다는 이야기들 따위를 나는 잘 믿지 않음. 내 스스로도 굳이 “이주노동”을 해 보았던 경험 때문인 것도 있음. 상식적으로 갑을관계만 생각해도 불체자 사례들은 사업주측에서 잘못하는 게 더 많지 않을까..? 계약 및 근로계약 갱신시 비자 확인하고 정부에 신고할텐데 모르는 게 이상하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불법체류자 입장에서 괜히 문제만들어서 쫒겨나려 하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2. 해당 영상의 상황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이후 난민을 받고 아이티를 지원해오던 도미니카 공화국의 대법원에서 2013년 아이티계 도미니카 공화국 내 출생자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겠다고 판결 내린 것에서 시작된다. 2011년에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어난 아이티인은 무국적자가 되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이를 비판해서, 귀화를 돕는 샛길을 만들어 놓게는 되었는데, 그 과정상에 문제가 많다. 이 영상이 찍힌 당일날 마감을 놓친 모든 이들을 아이티로 돌려보내겠다는 것이 그 문제의 핵심이다. 적법한 서류를 갗춘 시민이더라도 서류를 못 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마감을 놓치는 순간 시민권을 받지 못하는 졸속행정 상황이 영상이 촬연한 내용이다. 끝내 마감 시간이 야간으로 늘어나고, 다음 날로 넘어가지만 급한 대로 대기자들에게 이민성 비치 팜플렛을 제공하며 다음날 오면 다시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팜플렛에 사인이나 도장, 책임자 등 아무런 권위도 부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대기자들이 이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냥 행정적 무능은 아니고, 특정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당 기사에서 보듯,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에서는 만성적인 대응책으로 일관하면서 미주 인권재판소까지 탈퇴하였다. 도미니카 공화국 측 입장은 선진국이 아닌 도미니카 공화국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아이티 이주노동자 수가 한계에 달했으며, 아이티 대지진 이후 다른 나라들이 더 많은 난민을 받으라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하지만 미주나 국제사회 내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의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을 테니, 이런 지지부진한 아이티계 노동자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어떤 국가도 아이티 문제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아이티에서도 다음과 같이 이에 대해 감정이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력 격차가 서로 큰 만큼, 도미니카 공화국 측이 눈을 꿈쩍이라도 할까,

도미니카 공화국 측은 플랜테이션 농업이 경제에서 꽤 큰 축을 차지하는데, 아무래도 플랜테이션은 저임금 노동이 많이 필요하고, 이런 소득상위계층의 이해는 아이티계 난민으로 인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고 임금이 저임금화되어 피해를 보는 소득하위계층의 아이티계 난민에 대한 분노와 같이 연합되기에 국내 소득 분배의 문제를 아이티라는 나라에 대한 분노로 해소하여 이러한 소득격차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경 유착의 정도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 미헬스의 논리를 빌려 본다면, 정당의 과두가 되는 이는 무급 선출직인 경우 브루주아만이 그 위치에 오를 수 있고, 유급이라면 소득 없는 이라도 그것에 집착하며 부패하기 쉽다.

우리나라 이주노동자 문제도 같은 프레임으로 생각해 볼 만 하다고 생각한다. 신문에는 이주노동자 범죄와 이주노동자 단속은 자주 나오는데, 고용 사업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벌했다고 보도하는 신문은 자주 못 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신문을 보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 솔직히 이 외에 다른 이주노동자 신문은 찾기도 어렵다.(미국이나 캐나다, 베트남, 필리핀, 어딜 가도 우리나라 교민 신문이 있는 것은 참 대단한것 같다. 그나저나 중국동포 미디어는 꽤 많으니,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나 현지 생활에 관해 듣고 싶다면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이를테면 연변TV, 연변일보, 길림신문,)

이건 다음에 읽어보려고 여기 링크를 남긴다.

3. 하지만 아이티 입장에서 해당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당 영상에서 “이것은 부패한 아이티 정부가 저지르고, 도미니카 인들이 값을 치르고 있는 문제입니다.”라는 논지로 한 주민이 발언한다. 아이티 정부가 왜 부패했을까? 앵거스 디턴에 따르면, 1990년대에 IMF의 신자유주의적 압박과 함께 탈냉전 질서가 아프리카 빈국들에 대한 원조를 감소시켰다고 한다. 빈국에 대한 원조가 복지병을 만들고 해당국의 산업 발달에 대한 필요성을 감소시키며, 동시에 외국의 무상 원조 물자가 빈국의 산업을 파괴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원조는 원조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도로, 마치 옥수수가 미사일이 되듯이 사용처가 바뀌기도 쉽다는 것이 그 논지였다. 즉, 냉전 당시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적인 정치적 원조이나 평화적 명분을 뒤집어 쓴 원조가 많았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또한, 만약 국가가 국민의 조세에서 예산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국가는 국민의 눈치를 볼 이유가 사라진다. 곧 선거나 국민의 압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정부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재 정부가 들어설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때는 원조국의 비위를 맟추기만 하면 되는 사실상의 식민 상태나 다름이 없다. 자본주의 시장질서의 파괴가 곧 민주주의 질서의 파괴가 된다는 이론이다.

재미있는 것은 디턴의 분석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원조액이 줄어들자 아프리카 나라들의 경제성장 지표가 상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분석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논문을 보면, 다른 입장이 제시되어 있다. 1990년대가 아닌 1970-80년대의 신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어쩃든 디턴의 논지를 그대로 아이티에 적용해보면, 아이티 정부 측에서는 원조를 받는 구조일수록 엘리트가 부패하기 쉬운 가능성이 있다. 해결 방법은 원조한 금액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하여 전용을 막는 것이지만, 공공기관이나 공기업 지사에서 유령 동호회 유령회식 등록하고 예산 떼어먹듯이 전용 막는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4.아무튼, 아이티계 이주민 입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해당 영상을 보면, 60년대부터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일해서 실질적으로는 3대가 도미니카 사람인 아이티인도 있으며, 그냥 십여 년 전부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일하는 적법한 서류를 갖춘 이도 있다. 무엇보다 행정 절차를 밟는다 해도 임시 허가증을 내어 줄  뿐이다. (이 기사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물론, 아이티 난민 입장에서도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불법 이주하는 것 외에 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떻게든 도미니카 공화국에 눌러 앉으려는 이들도 많다. 무임 승차자들을 따로 구분해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5. 다시 돌아가서, 요즘 난민 이주나 외국인 노동자는 각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유럽의 북아프리카계 난민들이나, 미국과 캐나다의 중남미계 난민, 오스트레일리아의 인도네시아계(서 파푸아 또는 이리안자야, 서티모르 등) 난민 등 뉴스에 보도되는 난민 문제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 같다. 우리나라의 이주노동자 혐오나, 일본의 조선적(조총련), 우즈베크 고려인의 러시아(원동 :연해주) 및 한국행, 새터민 등, 우리나라도 덜하지는 않다. 가계 부채가 증가하는 가운데, 만일 북한의 붕괴라는 혹시나 모를 떡밥이 터져 버린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나라는 아마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간의 관게처럼 매우! 골치아픈 일이 터져버리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것은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남북한간의 교류가 시작되더라도, 남한 측이 북한 내의 실질 행정적 구조를 대체하는 것은 어려워 보기 때문이다. 본인 살던 동네가 아무리 개판이라도 부자가 들어와서 가게를 차리든지 대장 노릇하며 이래라 저래라 하면 기분 나쁜 일이고, 외부인이 현지 사정을 이해하고 있을 리도 없다. 또 사고의 가치관이 이데올로기 차이로 서로 매우 이질적일 것이다. 그렇다고 현지인이 행정직을 차지한다면, 이상한 행정이 계속되어 온 북한 내에서 부정부패가 안 일어날 것 같은가? 그렇기에 북한 측에 거주하려던 이들도 인프라와 기업문화가 정착해 있는 남한으로 이주하려는 경향성이 매우 높아질 것이다.

또한, 북한 측 영변 핵발전소는 “흑연감속로”이다. 체르노빌 발전소가 이 흑연감속로인데, 불안정하고 위험하여, 많은 나라에서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모델이다. 매우 오래된 발전소임에도 계속 사용되는 것과 고리 원전을 가동중지하고 해체한다는 것을 비교해보자. 특히 고리 원전을 해체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 것도 고려해보면, 답이 없는 것 같다. 거기다 핵무기는 빈자의 무기라 불리는데, 1.핵발전소로 저렴한 전력 공급 2. 대칭 전력에서의 약세를 비대칭 전력으로 상쇄. 3. 기술적 수출 밎 과학기술 발전 4.국내 선전 및 열등감 해소 효과 등 가난한 나라에게 필요한 것이 싼 값에 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유용성 때문에,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일은 아마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핵 발전소 위기가 터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우리의 통념보다는 높을 것 같으며, 북한에는 이러한 핵 위기에 대응할 능력이 전혀 없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에 소련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소련의 1년간 예산을 다 체르노빌에 쏟아 부었다. 그렇기에 핵 위기가 터진다면 아이티 대지진은 저리 가라인 문제가 터질 것이다.

6. 뜬금없이 핵으로 독자 위협하고 글이 좀 뽕맞은 듯 삼천포로 새긴 했는데, 아무튼 북한 난민 다수가 발생하면, 아이티-도미니카 사태는 꽤 생각해 볼 만한 사례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아이티와 도미니카가 위치한 히스파니올라 섬과는 달리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인 지구멸망급 지정학적 위치에 있고 그래도 G20인 만큼, 이를 잘 이용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담으로, 걸핏하면 이놈의 헬조센 노답 이민 가는게  정답이라는 사람들에게 외노자 되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고자와 같다는 것을 강조해본다. 못믿겠으면 취업비자 한번 받아보시던지; 영주권 따려고 법 바깥에서 노예노동하다가 물먹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꽤 많음. 믿거나 말거나.

그 외 참고

주간경향 기사

수정 자본주의냐 신자유주의냐 : 토마 피케티와 앵거스 디턴.

*이 글을 올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글을 써놓고 이것이 말이 되는 글인지 말이 안 되는 글인지 스스로 답답하기 때문이다.(필자는 경제학에 매우 무지하여 경제학 이야기만 나오면 골치가 아프다.) <21세기 자본>이라는 그 두꺼운 책을 내가 완독한다음 이 글을 쓰지는 않았고, KBS파노라마의 토마 피케티 편을 참고했다. 그 외에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을 읽었다.

영상은 매우 재미있다.

아무튼 그러하니 개소리라는 생각이 든다면 과감하게 말해주기를 바람..

피케티와 디턴은 분명 몇 가지 공통된 의견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하고 이 불평등은 발전을 촉진시킨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망가진 자본주의 내의 순환고리는 자본주의 스스로의 발전을 붕괴시킨다는 점이다. 세 번째로 정치적 결정이 경제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피케티와 디턴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해서, 둘의 견해는 다르다기 보다,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다.

피케티는 사회 양극화, ‘지나친 불평등’의 심각성을 지적하며 쿠즈네츠 곡선을 비판한다. 경제성장이 부의 분배에 있어 양극화를 불러오지만, 궁극적으로 이 격차는 다시 줄어든다는 이 이론이 비판된다는 것은, 분배의 양극화가 다시 줄어들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는 말이다. 성장을 이야기하며 분배를 트렁크에 넣어두는 것은 둘을 궁극적으로는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 명분이 파괴되는 것이다. 반대로, 디턴은 자본주의 내의 성장이 세계에 갖고 온 절대적 이익을 이야기한다. 그의 책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보여주는 기대 수명 연장과 같은 지표들을 이야기하며,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음을 이야기한다. 디턴에게 불평등은 여전히 모두의 성장을 위한 동력이며, 이는 불평등이 열악한 이들의 삶을 질적으로 아직까지도 급격하게 발전시켜 주고 있다는 시각으로 바라봐도 무방할 것 같다.

피케티 논의의 출발점은 노동수익(노동에서 산출되는 수익)보다 자본수익(자본의 투자를 통해 얻는 수익)이 거대해지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성장률이 하락할 시에는 노동수익보다 과거에 축적했던 부가 더 많은 수익을 내기에 용이해진다. 즉 부를 갖고 있는 이들이 더 부유해지기 쉽고, 반대로 부유하지 않은 이는 부를 가진 이보다 부유해지기 어려워 빈익빈 부익부가 발생한다. 이렇게 하여 사회가 발전할수록 불평등은 심화되는데,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과도한 불평등은 계층간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기에 성장에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된다. 1928년과 2007년은 소득 불평등이 가장 심했던 시대로 중산층이 사라지고, 가계부채가 증가했으며, 가장 빈곤한 가구들이 부족한 소득을 대신하여 더 많을 빛을 지게 되므로 금융제도가 취약해졌다. 이는 1929년의 대공황, 2008년의 금융위기로 이어진다. 이는 자본에 대한 규제가 적었으며 빈자들의 구매력이 감소함에서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진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므로 정부 개입을 정당화하게 된다.

반대로 디턴은 빈자에 대한 지원이 빈자들의 발전에 더욱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세계 각국의 빈국에 대한 공적 원조가 그 나라 사회에 끼친 악영향을 이야기한다. 공적 원조는 빈국 내부에서 산업이 육성되는 등, 경제적인 순환구조가 만들어지지 못하게 억제했으며, 원조 자체도 불합리한 조건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큰 국가가 더 많은 원조가 필요한 것이 사리에 맞는데, 작은 국가일수록 더 많은 원조를 받는 이상한 구조가 대표적인 예이다. 원조들은 실제적으로는 정치적인 의도가 강했으며, 원조의 명분 또는 목적과 다른 부정한 목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빈국의 정치경제에 역설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주었는데, 조세에서 자금이 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력에게 정부 운용을 위한 자금이 발생함으로 정권 유지를 위해 자국민의 의사를 따를 이유가 사라지고, 외국 정부의 성향에 자신들을 맟추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민주주의 시스템을 대체해버리고, 정부에 유착하는 것이 시장 질서를 따르는 것보다 부유해지는 것에 더욱 유리해진다. 냉전 이후 이데올로기적 원조가 줄어듦에 따라 빈국들의 경제성장이 증가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전 세계적 자유시장이 빈국의 발전을 견인하여 이들의 ‘대탈출’을 돕는 것은 여러 다국적 기업들이 공장 등 일자리를 인건비가 낮은 빈국으로 이동시키는 것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는 선진국 내에서 자본을 가진 이만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전 세계적 규모에서는 극빈층과 부자가 동시에 성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정치적 결정이 경제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피케티는 루즈벨트 대통령 시기의 케인즈 주의 경제정책 시기에 미국 사회가 누린 호황과 반대로 자본소득에 대한 규제, 즉 시장에 대한 규제가 적었던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 시기를 비교하여 이를 강조한다. 앵거스 디턴이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들어 이야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만명의 사람을 살리는 데 새끼손가락을 희생하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는 점을 들어, 자본주의의 선순환에 대한 믿음을 보이며, 시장 질서를 지키는 정치적 결정이 왜 중요한지를 이야기한다. 디턴은 시장의 정의를 지키지 않는 것에서 자본주의의 실패가 일어난다고 보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리먼브라더스가 초래한 결과에 대해 정부가 정의롭게 그들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어떤 부분에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가 빠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피케티와 디턴이 이야기하는 톱니바퀴가 서로 다른 것과 같다. 디턴은 자신의 책 결론에서 ‘맨슈어 올슨은 조화되지 않은 다수를 희생하여 그 이익을 좇는, 그 수가 꾸준히 증가하는 이익 집단의 지대 추구로 위태로워진 부유한 국가들이 쇠퇴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했다.’고 한다. 이 이익집단은 시장 내에서의 윈윈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다. 피케티에게 있어서 이 집단은 다수를 희생해서 이익을 쫒는 1%일 것이다. 그의 논리를 통해 짐작하건데, 이들은 결국 다수의 구매력 상실로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피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디턴은 교육 발전, 폭력 감소, 수명 증가등을 통해 이러한 집단이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대탈주’가 계속 가능할 것이라 말한다. 디턴에게 빠진 톱니바퀴는 이러한 대탈주를 방해하는 인위적 개입일 뿐이다. 성장을 저해하는것은 인류 전반이 누리는 절대적인 이익에 대한 저해이며, 동시에 빈자들이 대탈주를 하는 데에 항상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디턴이 이야기하는 현대사회의 발전상은 피케티에게는 그렇게까지 긍정적으로만 보일 수 없다. 20세기에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능동적으로 재분배를 이끌지 않았고, 경제적 위기나 세계 대전 같은 거대한 사건들이 부의 재분배에 촉매재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의사소통과 국제협력의 능력이 크게 발전한 우리의 21세기에는 이러한 폭력적 사건이 일어나기가 더 어려워졌고, 어려울 것이다. 교육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하버드 대학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은 계급을 나누고 고소득층이 고소득층으로 대물림하는 구조 내에서의 관문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유럽 대륙의 대학이 모두 평준화 되었지만 여전히 시앙스 포 같은 고등교육기간은 남아있다. 그리고 이런 대학을 나온다 하더라도, <고리오 영감>에서의 라스티냐크에게 보르탱이 이야기하듯 그러한 고등교육이 그것 자체만으로 능력에 걸맞는 충분한 부를 약속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불평등 심화는 과거의 것과는 다른 차원 위에 존재하는 것이고 어떠한 대 사건을 맞이하게 될지는 실감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피케티의 이론이 힘을 얻는 것은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올슨은 <집단행동의 논리>에서 경제 성장이 둔화될 당시 사회 상위층이 자신들의 계층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던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반대로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 이것이 강하지 않았던 것은, 그 당시 자본가들의 소득 또한 많았기에 그러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라 한다. 피케티의 이론이 힘을 얻는 것은 자본을 갖고 있는 기업들이 자신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성장)은, 분배의 불평등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불평등이 1%의 성장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면 이 이론이 이렇게까지 지지될 수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도한 양극화는 빈자들을 파편화하고, 디턴도 이야기하듯이, 민주주의를 금권정치로 바꾼다. 나에게 이는 과도한 양극화가 오히려 시장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이야기로도 생각된다. 시장질서가 붕괴되면 자본가들이 그들의 지위를 지키더라도 자신의 파이를 키울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디턴이 이야기하는 논지는 또 하나의 한계 위에 있다고 생각된다. 디턴은 국내의 일자리가 더욱 가난한 나라로 빠져나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빈자들의 발전에 기여하지만, 해당 국가 내의 빈자들에게 기여하지는 않는다. 이는 내수 시장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한 국가 내부에서는 매우 치명적이다. 디턴의 이야기는 국내적인 규모에서 대탈출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 주권국가적 질서 내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한 국가들에서는 다수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설령 신자유주의적인 정책 하에서도 복지 정책에 대한 꾸준한 선호와 지출의 경향성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대처 정부 시절 복지 관련 지출이 더 늘어났던 것은 아마 이러한 부분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신자유주의 정부가 오히려 사회 하층에게 양극화를 고착시키고, 미봉책적인 복지정책을 내놓게 되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장기적인 해결책을 생각한다면, 이는 기업에 대한 규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앞서 말한 이유로, 이것이 더 나아가 결코 계층간의 이동을 촉진하는 정책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중은 여론을 모으기 어렵고,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모으기 더 쉽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해치는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여 교육이 관문적인 역할로 굳어버린 현실 또한 이러한 현실의 고착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