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철학과에 왔을때 갖고 있던 생각들에 대해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20살 1학년생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서 매우 반갑다. 신입생이라면 이런 질문을 많이 받을 것이다. ‘너는 왜 철학과에 왔는가?’ 나는 지금도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나는 여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사파적 기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일반적인 유년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
이것에 대해 긴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간단하게 정리하는데, 그냥 싸이코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하고 있던 생각들을 지금의 기억으로 되짚어보건데
1. 첫째는 “나의 실존”이다.
이 생각을 한 지는 매우 오래되었다. 왜냐하면 내 최초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알 수 없는 때(나는 무조건적으로 다섯 살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세 살일수도 있다. 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자아”를 인식한 것 같다. 첫 기억은 다음과 같다. 내가 황토색 장판 위에 앉아있고 앞에는 장롱이 있었다. 장롱은 아마 갈색이었다.(여기서, 내 기억이 얼마나 조작되기 쉬운지 실감한다. 나는 방금 전만해도 그것을 훨씬 이후에 산 청록색-흰색 패턴의 옷장으로 바꾸어 생각하였다.)
그 때 나는 최초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실존을 느낌에 가깝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마치 이런 느낌이랄까,
내가 왜 여기 있지/ 내가 왜 눈을 뜨고 있지/ 눈은 왜 사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보고 있는 거지/ 왜 나만 여기서 눈뜨고 생각하고 피부로 느끼고 몸을 조작하는 걸 뇌속에서 느낄 수 있는거지/ 왜 나는 방 밖에 있는 형이나 부모님이 움직이는 것 생각하는 것을 느낄 수는 없는거지/ 세상에서 하필 나만이 이런 것인가/ 신한테 선택받았는가/ 저기 움직이는 것들은 기계 같은 것은 아닌가
돌이켜보건대 이러한 느낌은 나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주었다. 여덟 아홉살때의 나는 만화적인 구성에 너무 빠져 있었는지(그렇기에 나는 뽀로로를 많이 보여주는 것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잘 모르겠다.) 검은 차량들이 지나갈 때마다, “나를 (악당 또는 검은 썬글라스를 쓴 양복쟁이들이) 감시하고 있는거야..!”라는 상상을 해보고는 했다. (그리고 만화의 마지막 장면 : “과연 윤재현은 악당들에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와 페이드인 되는 하단의 아티스 운동화 광고) 이런 상상은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가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아, 내가 이 상상을 현실로 전도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아무리 어렸어도 상상은 상상이었을 뿐)
이 “최초의 생각”이 얼마나 나에게 약을 오래 팔았냐면, 7살때인가 9살떄인가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나는 그때 느낀 그 충격을 온전하게 기억해야 돼! 그러려면 그 때 기억을 매년 억지로 회상해봐야 돼! 왜냐하면 내가 이 기억을 절대 안 잊을 줄 알았는데 오늘 문득 이 강렬한 기억도 까먹을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잠이 오더라도, 위급한 순간-이를테면 눈높이 답지를 배끼고 있더라도- 기억 해야 되어!”
라고 잠자려고 누워 있다가 생각하였고, 실제로 매년, 또는 격년으로 이 생각을 회상하였다.
철학과에 온 것도 이러한 동기가 없었다면 결코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새내기세미나” 라는 1학년생 수업에서 각자가 철학과에 온 이유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나 혼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이비 교주같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자리가 붕-뜨는 느낌을 받았었지만) 그래서 입학하자마자 찾은 게 이해도 못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던지 버클리 말처럼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의지도 없고 게으르고 겉멋만 들어 있던 나는 실제로 책을 몇 페이지 읽지도 않았다. 쇼펜하우어 책을 이해가 안 되어 노트에 정리하고, 그렇게 몇시간동안 읽은 게 두 장이었다. 그걸로 그때 내 노력은 끝났다.
하지만 지금도 이 생각은 내게 깊은 영향을 준다. 갑자기 당신이 나에게 와서 “야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냐? (손가락을 흔들며) 이게 몇개로 보여?” 라고 우스개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떨치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죽을 때쯤까지 기다려봐야 뭘 좀 알게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의 나는 “타자와 의사소통되어 만들어진 내가 존재한다. 외부와 육체의 합작품인 감각이 존재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이다.”라고 나를 육체에 한정되지 않은 합의된 존재로 보는데, 이런 생각에 영향을 주었으면서 동시에 위협을 주는 내 생각의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2.두번째로 의사소통에 대한 생각들을 하였다. 철학과에서는 토론 수업은 무진장 많이 한다. 특히 일학년때는 거진 대부분의 과목이 그러하다. 첫 학기에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는 놈 취급을 받았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이랄까, 원천적인 거부감 속의 토론자였다. 그 때 했던 생각이 내가 A를 생각하고 “매체”를 통해서 말하면 Aa의 형태가 되고 이것을 청자가 들었을 때 A’a의 형태가 되고 그것을 청자는 다시 A’a’로 이해했다고 말하며, 이에 대해 다시 내가 말할 때는 방금 전에 했던 A와는 또 다른 생각A”을 하면서 이를 A와 같은 것으로 바라본다는 이러한 생각이었다. 물론 이것은 “나는 그저 성실하게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핀트없는 바보로만 듣고 있다”는 나름대로의 억울함 속의 항변이었다.
2학년 때부터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통해 어느정도 전향적인 결론이 잡히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말은 알아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솔직하게 내 스스로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란 어떠한 약속 위에서 해야되고 이것이 일관성이다. 흔히 핀트라고 이야기하는 논쟁의 초점이나, 주장의 불변성이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일관되지 않으면 듣는 이는 나와 대화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에게 진솔함을 희생하여서라도 일관된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이것이 내 생각이다. 궁극적으로 내 입장 네 입장이 있기 전에 이야기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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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블로그에 이러한 글을 쓰게 된 것은 게으름 때문이란 것을 밝힌다. 나는 고쳐야 되는 글이 있으며, 영어 공부도 해야 되고, 제작한 영상도 뜯어고쳐야 되며(토론 영상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해 보고 있다.), 다음 토론 영상의 주제인 “퀴어퍼레이드의 노출, 과한 것인가, 과하지 않은 것인가”에 대해서 주장하기 위해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어 보기도 해야 되었다. 하지만 광기의 역사를 읽다가 예전에 끄적인 Aa -> A’a같은 낙서(2번 생각의 그것)를 발견하였고,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
사실 <광기의 역사>(김부용 옮김)는 1학년 겨울방학에 수능공부하듯 열심히 읽었다.(아마 부모님은 매일 5시에 일어나서 어딘가를 나가니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갈 하고 있긴 하나보네’하고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놓고도 3-4부 정도 까지밖에 못 읽었다. 하루 내내 눈을 부릅뜨고 읽어도 10장 20장 채 못읽고 책만 침에 불어나게 만들기는 했다. 이때 토익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광기의 역사는 사실 위의 1번 2번의 생각에 대하여 고민해보기 좋은 주제를 갖고 있다. 본인 스스로가 갖고 있는 세상과 양립하지 못하는 광기에 대해서 고민해보기 좋은 책이고, 광기와 이성의 말 같지 않은, 벽보고 이야기하는 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기 좋은 지점들을 던져준다.
그리고 퀴어퍼레이드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사실 퀴어퍼레이드에서 때때로 볼 수 있는 용납되기 힘든 복장 및 미친짓들은 사회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광기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계약론이 과거 대두되었던 것에서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대사회는 개인이 모여서 만들어진 합의물로서의 사회라는 인식 위에 있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대화이전에 언어를 선택하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자마자 특정 국적, 특정 언어가 강제되는 내가 있는 것처럼 사회는 폭력적, 강제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모든 축제는 이러한 일상에서의 일탈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미친 짓이 있어야만 축제가 되고 미친 짓을 보러 축제에 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적인 대화의 현장이 아니다. 광기가 스스로의 실존을 드러내는 아바타이다. 아무도 동네에서 보는 것과 똑같은 것을 보러 축제에 가지는 않는다. 축제에서는 모두 앞을 알 수 없는 암흑, 일탈, 미친 짓을 기대한다.
한편 퀴어퍼레이드라는 소수자의 축제는 정기적으로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합의한 결과물이기에 “합의된 광기”이다. 대화는 “표준”위에서 가능한데, 이것은 소위 말해지는 “이성”또는 “다수자의 길”이다. 광기또한 일방적인 외침이라 하더라도 “대화”의 형식을 통해 “말은 안 통하지만 한번 들어보자”의 형식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모순 위에 존재한다. 모순은 광기 스스로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퀴어 축제는 일반적일 수 밖에 없기도 한다. 일반적이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반적이어야 하고, 일반적임이 감출 수 없는 일반적이지 않음으로서 축제는 스스로 모순덩어리이다. 그래서 퀴어퍼레이드의 문화의 과단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퀴어퍼레이드 뿐 아니라 뉴라이트, 어용단체, 진보세력, 빨갱이, 어머니들, 종교단체 모두의 집회 및 축제에 적용 가능하다.)